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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내 휴대폰은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지만, 나 자신보다 임세린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설정한 비밀번호는 거의 모두 임세린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임세린이 쉽게 내 휴대폰을 열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테이블로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놓고 휴대폰 화면을 보니 박겸의 문자였다. “인생의 선택은 외나무다리가 아니야. 사실 너한테는 선택지가 아주 많아. 세린 씨는 좋은 사람이지만, 재은이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 재은이는 널 지켜본지 아주 오래고 널 좋아한 지도 아주 오래야. 심지어 대학교 때에도 나한테 자주 네 소식을 물었어.” “난 연애 경험은 없어. 하지만 사람 감정에서 먼저 다가가는 쪽이 더 민감하고 비굴하다는 건 나도 알아. 세린 씨와 더는 힘들다면, 재은이한테 기회를 줘. 걱정하지 마, 재은이는 절대 선을 넘지 않아.” 난 이 직설적인 문자를 보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이 적합할까? 다행? 아니면 자랑? 둘 다 아니었다. 내 마음은 지금 너무 복잡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꼭 한 단어로 설명해야 한다면 아마도 죄책감 같았다. 심지어 죄책감으로도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쓰레기는 추재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내 인생은 꼬일 대로 꼬였고, 심지어 곧 죽을 몸이었다. 그리고 곧 죽을 몸이 아니어도 추재은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마음속은 임세린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비록 지금은 비었지만, 새 사람과 다시 시작할 공간과 정력이 없었다. 그 뒤로, 난 박겸과의 연락이 뜸해졌다. 사실은 추재은을 만날까 봐 두려웠다. 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낡아 빠진 몸으로 추재은의 사랑을 더럽히기 싫었다. 나와 임세린의 관계도 잠시 평형을 유지했다. 그 여자는 여전히 유강우와 붙어 다녔고, 나도 그 시간에 디자인에 관한 지식을 배웠고 가끔 설계도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강의는 인터넷의 공짜 강의를 들었다. 비록 아르바이트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었고 심오한 내용은 배울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재미있었다. 아마 스스로 내 마음을 마비하는 방법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짜로 강의를 듣던 웹페이지의 하단에서 이벤트를 발견했다. “후지노 모토 님이 이번 주 토요일에 디자인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오니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후지노 모토?’ 난 잠시 멍했다. ‘후지노 모토는 디자인 업계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사람이잖아? 왜 이런 작은 도시에서 전시회를 여는 거지?’ 비록 의아했지만, 아무 망설임도 없이 신청 버튼을 눌렀다. 난 더 많이 배우고 싶었고 이번 디자인 전시회는 내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난 전시회에 아주 큰 기대를 품었고, 전시회가 열리는 날, 특별히 내가 가장 격식 있다고 생각하는 옷을 꺼내 입었다. 하지만 여기서 추재은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어이없는 상황은 유강우와 임세린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추재은은 나를 발견하고, 바로 웃으며 다가왔다. “너 요즘 일부러 날 피하는 거지? 그날은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헛소리 좀 했을 뿐이데 겸이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나 봐. 신경 쓰지 마.” 난 이 익숙한 화법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바로 사람 감정에서 가장 비굴한 화법이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이 들통나도 이유를 만들어 자신을 감싸고 있으니 참 조심스럽고 비굴했다. 하지만 난 추재은의 이런 비굴한 모습이 가장 두려웠다. 나 같은 쓰레기한테 너무 과분했다. 그리고 이제 난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했고 내 인생을 똑바로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난 맹세코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요즘 일이 많아서 바빴을 뿐입니다.” 말을 마치고 바로 떠났다, 하지만 추재은은 내 뒤를 따라왔다. “무슨 일인데? 많이 바빠? 너도 전시회 좋아해?” 추재은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했다. 난 추재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실망의 빛을 발견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애써 화제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난 웃는 얼굴조차 보여줄 수 없었다. 추재은이 깊숙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내가 왕자병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사람 감정에서 비굴한 쪽이 무조건 당하게 되는 법칙 같은 거였다. 그리고 이 법칙에 예외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상대의 취약하고 예민한 자존심을 건드릴 것 같아 호통칠 수도 없었다. “재은 씨, 이 사람은 유부남인 걸 몰라요?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꼬리 칠 수가 있죠?” 내가 어쩔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임세린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고 조금 무서웠다. 추재은의 따뜻한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임 회장님,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되죠! 꼬리 친 게 아니라 친구끼리 얘기 나누는 거예요. 그리고 세린 씨야말로 자신이 유부녀라는 걸 잊은 것 같은데요?” 말하는 한편, 추재은은 여전히 임세린의 팔짱을 끼고 있는 유강우를 바라보았다. 그 뜻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말싸움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다들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한 사람은 디자인 업계 탑급 회사의 회장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재벌가의 딸인 데다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며칠 전에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는데도 아무 말도 못 한다고 놀림 받았던 강주환이니 누가 봐도 너무 흥미진진한 상황이었다. 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온몸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따끔함을 느꼈다. 난 교제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이 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듣기 불편한 말까지 내뱉고 있어서 미친 듯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피가 점점 내 머리에 쏠려 머리가 어지러웠고, 심지어 다리 힘이 풀렸다. 난 그제야 알아차리고 미친 듯이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내 몸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다시 한번 쓰러졌다. 뇌암이 발작한 거였다. 눈을 떠보니 역시 익숙한 연한 하늘색 천장이 보이고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내 병상 변두리에는 추재은이 엎드려 있었다. 누가 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깨나면서 움직임이 너무 컸는지, 아니면 추재은의 잠이 너무 얕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깨어난 후, 1분도 지나지 않아, 추재은은 빨개진 두 눈을 떴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추재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나를 품에 껴안고 흐느끼며 말했다. “뇌암 말기라며? 왜 말하지 않았어?” 추재은을 밀어내려던 내 손이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밀어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전 아내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지 마세요.” 말을 마치고 침대에서 내려가려 했지만, 추재은은 나를 말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거 놓으시죠.” 내 목소리는 갑자기 차가워졌고, 힘껏 추재은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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