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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박겸은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난 그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겸은 디자인 부서 부장으로서 회사의 모든 디자인을 직접 살펴봐야 했으니, 휴식하면 모든 프로젝트를 잠시 멈춰야 했다. 그러니 상사한테 얘기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런 대기업에서는 아무리 학력 높은 유학파라 해도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박겸이 날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난 조금 슬펐다. 평소에 연락도 자주 하지 않던 소꿉친구가 날 위해서 이 정도까지 해주는데 날 사랑한다던 그 여자, 혹은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는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었다. 난 누군가가 내 목숨 꽉 잡은 듯이 숨쉬기마저 힘들었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고 언젠가는 꼭 이 지옥 같은 결혼에서 벗어날 거라고 결심했다. 그날, 하루 종일 박겸의 집에 있었고 휴대폰이 배터리가 떨어져 꺼진 줄도 몰랐다. 박겸의 집 서재에 있는 디자인과 관련된 책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난 디자인에 관한 지식을 조금 알고 있었지만 겨우 용돈을 조금 벌 수 있는 정도에 그쳤다. 난 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벌어서 밖에서 집을 맡고 살거나 홀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밖의 세상이 정말 내 생각처럼 아름다운 건지 알고 싶었다. 내가 휴대폰의 배터리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저녁 7시였다. 그 당시, 박겸이 밥 먹으라는 소리에 평소처럼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난 박겸의 충전기를 빌려 휴대폰에 꽂고 밥 먹으러 갔다. 정말 너무 배가 고팠다. 비록 금방 깨어났을 때부터 너무 배가 고파서 위가 아팠지만, 박겸이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가 꼬치꼬치 캐물을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박겸은 혼자 살고 있었고 요리에 흥취를 가지고 있었다.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지만, 내 요리 실력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난 한때 임세린을 위해 요리 공부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임세린은 회사에서 돌아오면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난 그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하여 열심히 요리 실력을 갈고닦았고 번마다 다른 요리를 해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효과가 좋았고 임세린은 늘 예쁜 미소를 지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로는... 그 뒤로는 수많은 남자를 집에 끌어들였고 내가 정성 들여 준비한 요리는 쓰레기 취급당하며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다행히 밖에는 유기견이 살고 있어 매번 그 친구가 대신 먹어 주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니 그 친구는 심지어 살이 쪘다. 식사가 끝나니 어느덧 8시가 되었다. 나한테는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충전된 휴대폰을 들고 박겸의 집에서 나왔다. 여기는 아무리 좋아도 내 집이 아니었고 내 세상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렇다고 줄곧 피할 수는 없었다. 난 걱정으로 가득한 박겸의 눈빛을 뒤로하고 어두움 속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배가 넓은 바닷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고독하고 위험천만해 보였다. 돌아가는 길에 습관적으로 꺼진 휴대폰을 켰다. 그리고 휴대폰을 켜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임세린이었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 “너 어디야? 왜 집에 없어?” 임세린의 목소리는 너무 무거워서 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난 박연의 집에 있었던 일을 감추려 했다. 그걸 말하면 오늘 정신 잃었던 일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난 내가 정신 잃었던 일을 임세린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알려줘 바야 그 여자의 입장만 난처해질 뿐이었다. “청솔 마을에 있었어.” 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지어 내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난 거짓말을 했다. 난생처음으로 임세린에게 거짓말을 했다. 말을 마치고 바로 두려움이 덮쳤다. 임세린이 발견할까 봐 두려웠고, 또 온갖 모욕과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작은 기쁨도 있었다. 그것은 늘 반복되던 일상에서 벗어난 흥분 같은 거였다. 정확히는 반항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청솔 마을?! 너 지금 당장 돌아와!” 임세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조금 녹았고,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40만 원을 이체해 주었다. 아마 택시비인 것 같았다. 임세린은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청솔 마을은 내가 사는 도시의 서북쪽에 있는 전통 마을이었다. 그곳은 나와 임세린이 처음 데이트했던 곳이었고,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곳이기도 했다. 난 그날 밤의 가장 밝았던 별과, 가장 조용했던 호수, 그리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있던 가장 아름다운 임세린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밤 10시가 넘었다. 10시는 나한테 아주 무서운 시간이었다. 때는 어느 가을날의 밤이었고, 나와 임세린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세린의 생일이라, 난 수업이 끝나고 나면 늘 남몰래 아르바이트하러 다녔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임세린의 생일 전날, 의외의 사건이 터졌다. 난 동네 건달들한테 잡혔고 골목 모퉁이에서 돌멩이, 몽둥이 등 물건에 사정없이 맞았다. 그날, 난 많은 피를 흘렸고 건달들이 떠난 뒤에도 한참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연락을 받지 못해 걱정된 임세린이 나를 찾으러 나왔고 바로 골목 모퉁이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임세린은 알고 있었다. 비록 난 말한 적이 없지만, 임세린도 나의 그 특별한 선물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고 임세린은 서럽게 울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내가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연한 하늘색 천장 아래에 걸려있는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뒤로, 10시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 되었다. 난 심지어 10시 이후에는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했었다. 그리고 금방 결혼했을 때는 임세린에게 10시 전에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요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집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사람은 유강우가 아니라 표정이 차가운 임세린이었다. “강주환, 너 많이 컸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 10시야! 10시! 전에 있었던 일을 다 잊었어? 아니면 날 피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이 집에서 도망치고 싶어?” 임세린은 난폭하게 나를 집 안으로 끌어당겼고, “쾅!”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를 소파 위에 밀어 던지고 천천히 다가왔다.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고 난 호흡마저 가빠졌다. 난 도망이라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난 그제야 오늘 박겸의 집에서 그렇게 편안했던 이유가 잠시 임세린의 옆에서 도망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자기도 모르게 말라 터진 입술을 벌렸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임세린은 내 앞으로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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