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5장

최현우의 얼굴이 약간 굳었고, 잠깐의 침묵을 끝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김여옥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손자며느리가 무슨 수로 손자의 차에 올라타 혼인신고까지 하도록 설득했는지 사뭇 궁금했다. “할머니랑 통화하는 내용을 상대방이 듣고...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손자에게 물었다. “네가 순순히 대답했다고?” 최현우는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비록 거절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은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고, 게다가 본인이 뱉은 말을 지킬 수 있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기도 하늘에서 남편이 뚝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둥 신이 나서 혼인신고 하러 가자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생각할수록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려 천하의 최현우가 고작 낯선 여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다니! “할머니, 전 한 번 내뱉은 말은 번복하는 법이 없죠.” “하하하!” 김여옥이 웃음을 터뜨렸고, 이미지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박장대소했다. “아이고, 배야. 너한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맞선도 안 보고 허구한 날 이 늙은이의 화만 돋우더니 쌤통이네. 단번에 마지막 단계까지 프리 패스로 가서 좋겠다? 이제 혼인신고도 했으니 모태 솔로 노총각에서 하루아침에 유부남이 되었군.” 최현우는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로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사실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것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김여옥과 기 싸움에서 결코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홧김에 못 이겨 오히려 아내가 생긴 꼴이 되다니. “그럼 우리 손자며느리는 어디 있어? 혼인신고도 했는데 같이 안 왔어?” 김여옥은 한참을 웃은 뒤 손자며느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현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혼인신고하고 나서 바로 갔어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집이 어딘지 묻지도 않고?” “네.” 이내 머릿속에 고아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치 구청에서 죽치고 있는 것 같았고, 게다가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꼼수까지 부렸다. 그리고 혼인신고하고 나서는 임무를 완수한 사람처럼 잽싸게 도망갔다. 단지 결혼할 상대만 나타난다면 누구든지 상관없는 듯한 태도였다. 순간, 씁쓸한 기분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김여옥이 다시 물었다. “그 여자는 어디 산대?” “몰라요.” “둘이 진짜 무작정 결혼부터 했어?” 김여옥은 사진 속의 여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뛰어난 미모가 너랑 참 잘 어울리는구나. 생기가 넘치는 커다란 눈망울은 영리함이 느껴져서 전체적으로 기분 좋은 느낌이 들어. 고아라? 이름도 참 예쁘네. 고상하면서 기품이 넘치는군. 이름만 알면 되지, 뭐. 할머니가 대신 조사해줄게. 아, 아니야. 네가 직접 조사하게 해야지. 자기 와이프인데 스스로 알아보려고 노력 정도는 해야지 않겠어?” 김여옥은 고아라의 뒷조사를 하고 싶었지만, 손자가 천천히 알아보도록 생각을 바꾸면서 마음을 접었다. 책을 읽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관심 없어요. 어차피 이혼할 건데.” 최현우는 할머니의 손에서 혼인신고서를 건네받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돌아가 앉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제 만족하시죠? 저한테 더는 결혼 강요하지 말고 타깃을 바꿔 봐요.” “어디서 감히 이혼부터 운운해!? 적어도 1년은 무조건 결혼 생활 유지해!” 김여옥은 그에게 손자며느리를 알아갈 시간을 1년 정도는 주고 싶었다. 만약 그동안 감정이라도 생기면 인연이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며, 서로 관심이 없다면 그때 가서 이혼해도 늦지 않았다. 어차피 나이도 어린지라 아직 살아갈 날이 길었다. “언제 결혼 발표할 거야?” “발표할 게 뭐 있죠? 기자들이 그 여자의 신상을 파헤치지 못해 안달 날 게 뻔한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의 이름을 제외하고 정작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심지어 연락처도 없는데 대체 무슨 발표를 한단 말이지? 김여옥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비밀로 하겠다는 거야? 마음대로 해. 비록 깜짝 결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운명이니까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기 마련이지. 이 할머니는 단지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야.” 이내 앞에 놓인 미지근한 물을 두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 봐. 할머니는 이만 가볼게.” 최현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조심히 가세요.” 점심,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듯싶은데 벌써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차를 타면 그의 집까지 20분이 걸렸고, 평소에는 집에 가서 밥을 먹는 대신 주로 회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센트롤 호텔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센트롤 호텔은 퀸즈 그룹 산하의 기업이며 인하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 중 하나였다. 김강수와 경호원 4명이 사옥 1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최현우를 보자 김강수가 서둘러 다가갔다. 최현우는 그가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는 것을 눈치챘고, 이내 힐끗 쳐다보고는 멈춰서는 대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김강수가 뒤를 따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작은 사모님께서 오셨어요. 사옥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에 최현우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고, 심연 같은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김강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본인이 부른 것도 아닌데 대체 왜 노려보는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갔다. 결국 겁에 질린 나머지 식은땀마저 났다. 둘이 혼인신고 하느니 마느니 할 때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자신뿐이었고, 심지어 개인 경호원조차 몰랐기에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마지못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왜 왔대요?” 최현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퀸즈 그룹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고아라와 서로의 신상에 관해 물어본 적이 없는데 여기까지 무슨 수로 찾아왔단 말이지? 김강수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죠. 작은 사모님께서 아침에 탄 차를 몰고 오셨는데 사옥 앞에 주차하더니 운전석에서 내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보닛에 기대어 서서 기다리고 계세요. 여유가 철철 흘러넘치는 모습으로 건물만 쳐다보고 있기에 도련님을 뵈려고 찾아왔다고 생각했죠.” 최현우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갑자기 낯선 여자와 결혼한 게 후회되었다. 결국 그는 고아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모든 것을 쥐락펴락해야 성에 차는지라 주도권이 빼앗긴 느낌에 심기가 불편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최현우는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김강수에게 말했다. “그 여자는 무시하고 이따가 바로 출발해요.” 회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딱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김강수는 묵묵부답했다. 하지만 최현우의 매서운 눈빛을 보자 등골이 오싹하더니 잽싸게 꼬리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최현우는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네 명의 경호원도 일제히 뒤를 따랐다. 김강수는 몰래 식은땀을 닦고 나서 빠르게 쫓아갔다. 한편, 고아라는 퀸즈 그룹 정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최현우는 아니었다. 물론 최현우가 퀸즈 그룹의 대표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고, 단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은비의 연락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은비는 어머니한테서 그녀가 시내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얼른 전화를 걸어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공교롭게 이은비도 퀸즈 그룹에서 근무했고, 이는 퀸즈 그룹 입구에 고아라의 모습이 보인 이유이기도 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