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상대방은 다름 아닌 최현우의 할머니 김여옥이다.
“할머니 잔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면 얼른 연애하고 결혼이나 해. 30살 먹은 노총각이 젊은 처자를 만나서 데이트해도 모자랄 판에... 쯧쯧, 나처럼 들들 볶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평생 홀아비로 살 거야?”
최현우는 할머니의 신랄한 비판에도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여전히 쌀쌀맞은 말투로 일관했다.
“딱 한 시간이에요. 그 사이에 저랑 결혼할 여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회사로 돌아갈 거예요. 저 바쁜 사람이에요. 그렇게 손자며느리가 보고 싶으면 나머지 놈들한테 얘기해요.”
“장남이 아직 결혼도 안 하고 버티고 있는데 내가 재촉한다고 그 자식들이 꿈쩍이나 하겠어? 알아서 여자 잘 만나고 다니는 다른 집 애들과 비하면 너희들은 밥만 축내는 가축에 불과해!”
결국 그는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내고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내 쉬지 않고 쏘아대는 쟁쟁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최현우! 또 휴대폰 내려놓고 딴짓하는 거야? 할머니 잔소리가 듣기 싫다는 거지? 좋아, 딱 1시간 줄게. 지금 은실이한테 얘기해서 손녀딸을 보내라고 할 테니까 구청에서 혼인신고 해!”
말을 마치고 나서 김여옥은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이은실과 김여옥은 오랜 벗으로 집안끼리도 사이가 돈독한 편이다. 또한, 이은실의 손녀인 신유진은 최현우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기에 양가 어르신은 둘을 맺어주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정작 장본인들은 서로 가족처럼 여겼다.
최현우는 태연자약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김여옥의 부탁을 들으면 신유진은 도망칠 궁리만 할 게 뻔했기에 구청에 올 리가 만무했다.
이내 싸늘한 시선으로 다시 옆 차량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고아라는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최현우와 눈을 마주쳤다.
서로에게 향한 눈동자 중에서 한 쌍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다른 한 쌍은 흥미진진했다.
아까 창문을 내리기 전이라 상대방의 대화 내용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최현우는 보면 볼수록 멋있는 남자였다. 여태껏 살면서 만났던 사람과 귀신을 통틀어 외모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때, 운전기사 김강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는 남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은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쌀쌀맞은 탓에 눈빛이 유난히 차갑고 매서워서 최씨 가문 고용인들은 차마 똑바로 마주 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런데 맞은편의 낯선 여자는 겁을 상실했는지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니?
김강수는 속으로 고아라의 용기에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때, 어떤 여자 귀신이 최현우의 차를 향해 걸어가더니 그를 보자마자 차에 타려고 했다.
곧이어 뒷좌석으로 유유히 다가간 다음 남자와 마주 보고 앉으려는 순간 고아라의 차가 멈춰 선 곳까지 튕겨 나갔다.
고아라는 이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여자 귀신은 겁에 질린 듯 몸을 웅크린 채 감히 최현우를 쳐다보지 못하고 그녀의 차로 도망쳤다.
고아라의 시선이 조수석을 향했고, 재빨리 몸을 숙여 차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 귀신이 의아한 얼굴로 고아라를 바라보았다.
고아라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 눈에는 보이니까 얼른 타.”
여자 귀신은 서둘러 차에 탔다.
고아라는 문을 닫고 차창을 다시 올린 다음 여자 귀신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괜히 헛수고하지 마. 저 남자는 네 남편이 되어줄 수가 없어. 만약 신랑감을 찾는다면 다른 사람으로 알아봐. 기운이 워낙 강해서 가까이할수록 오히려 본인이 다치기 마련일 테니까.”
여자 귀신이 고개를 떨구며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잘 생겨서 첫눈에 반했어. 옆에 있고 싶어 다가갔더니 튕겨 나갈 줄이야...”
“그러니까 널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고.”
“모처럼 멋진 남자를 만났더니... 내 남편이 아니었어.”
“귀신도 인연이 정해져 있거든. 부부연도 없는데 강요한다고 되겠어?”
잠시 생각이 잠긴 듯한 여자 귀신이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어. 고마워. 이제 괜찮아.”
“그럼 이만 가 봐. 문 열어줄게.”
고아라는 다시 몸을 숙여 조수석 문을 열어 여자 귀신이 차에서 내릴 수 있게 했다.
반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최현우는 일부러 관심을 끌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지 싶은 의심이 들었다.
여자 귀신을 보낸 후 고아라는 다시 창문을 내리고 최현우를 쳐다보았다.
귀신마저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실 그녀도 매한가지이긴 했다.
비록 쌀쌀맞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나름대로 까칠한 멋이 있어 눈 호강하기에는 충분했다.
띠링.
이때, 최현우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고 여전히 김여옥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이 세상에서 지치지도 않고 최현우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녀밖에 없다.
이내 통화 버튼을 터치했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최현우, 정말 구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할머니, 전 농담 같은 거 안 해요.”
“구청은 결혼하거나 이혼하는 사람이 오가는 곳이야. 결혼은 커플끼리 찾아갈 것이고, 이혼은... 너 설마 이혼녀를 찾으려고 하는 거야?”
“이혼녀든 미혼녀든 상관없어요. 나랑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있으면 당장 혼인신고 할 거예요.”
김여옥은 말문이 막혔다.
“할머니가 화가 나서 죽는 꼴 보고 싶어? 추석에 제사라도 지내려고 그러는 거야?”
“전 할머니가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차 안에 있지?”
최현우는 대답하는 대신 묵인했다.
“차에 앉아 있으면 마누라가 알아서 찾아올 것 같아? 당장 내려서 ‘결혼할 사람을 구합니다’라고 쓰인 종이를 몸에 붙이고 서 있어. 1시간은커녕 10분도 안 되어서 아내를 만나게 될 테니까.”
최현우의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차에서 기다릴 거예요. 그래도 저랑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때 혼인신고 할게요.”
차에 있으면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을 텐데 누가 결혼해주겠다고 나서겠는가?
사실 이는 최현우가 매일같이 결혼을 재촉하는 할머니에게 반항하기 위해 내세운 초강수에 불과했다.
김여옥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전화를 끊었다.
남자의 눈동자에 승리를 상징하는 의기양양함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김여옥이 아무리 끈질기게 괴롭히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만드는 방법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번에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는 청력이 뛰어난 고아라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잽싸게 작은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 최현우가 탄 뒷좌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최현우는 무의식중으로 고아라를 올려다보았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던 여자라는 것을 발견하자 눈빛이 서늘하게 식어가더니 쌀쌀맞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혹시 아내가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리는 거예요?”
최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아라가 피식 웃었다.
“마침 나도 하늘에서 남편이 뚝 떨어지길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그쪽이랑 결혼할 의향이 있으니까 주민등록증도 챙겼겠다 이참에 들어가서 혼인신고나 할래요?”
10분 동안 관찰한 결과 고아라는 이 남자가 자신의 깜짝 결혼 상대임을 확신했다.
최현우는 물론 김강수도 어안이 벙벙했다.
심지어 김강수는 고아라의 대범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사람을 상대로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다니?
한참이 지나서야 최현우가 움직였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우람하고 다부진 체구가 고아라의 앞을 가로막았고, 강한 카리스마가 뿜어내는 압박감에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고아라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방은 족히 20cm는 더 커 보였다.
165cm가 되는 키도 그의 앞에서는 아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가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고, 당연히 무슨 말 하는지 잘 알고 있죠. 방금 통화한 내용을 똑똑히 들었어요. 차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래도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가 나타나면 혼인신고 하겠다고. 그쪽이야말로 본인이 뱉은 말을 지키려나 모르겠네?”
최현우는 족히 2분 동안 그녀를 쳐다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고아라가 생긋 웃었다.
“그럼 됐어요. 가시죠? 얼른 혼인신고 하러.”
이내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