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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아침 8시,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곧 폭우라도 내릴 것 같았다. “사부님, 주민등록증 주실 수 있어요? 오늘 어떤 남자랑 혼인신고 할 거예요.” 고아라의 말에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던 노인의 몸이 우뚝 멈췄다. 고정태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소녀는 당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때 발견한 고아였다. 녀석은 곧 아사 직전이라 개미에게 물려 온몸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어쨌거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 생각해 아이를 데리고 본인이 지내고 있는 우진산으로 돌아와 세심하게 보살폈고,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면서 키웠다. 그리고 고아라가 걸어 다니고 말할 수 있을 때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종종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는데 누구랑 얘기하냐고 물어봐도 다른 아이들과 대화하는 중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생김새까지 자세히 묘사했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는 고아라의 대화상대가 귀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녀석이 딱히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디 아픈 곳도 없기에 어차피 산에서 생활하면 한적하기 마련인지라 눈에 안 보이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같이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나중에 좀 더 크면 귀신을 못 볼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눈에 띌 줄이야! 심지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훤한 대낮에도 귀신이 보이는 듯싶었다. 고아라는 태어날 때부터 귀신이 보였다. 다행히 산에는 사제 두 명이 몇 년째 함께 살았는데, 가끔 그들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고아라에게 상대방이 놀라지 않도록 무엇을 보았든 간에 모른 척하라고 신신당부하곤 했다. “남자친구도 없는 사람이 웬 혼인신고?” 정신이 번쩍 든 고정태가 서둘러 물었다. “혹시 무언가를 예견한 거야? 아니면 또 뭐가 보여?” “5분 전, 큰 키에 검은색 슈트 차림의 남자와 구청에서 혼인신고 하는 제 모습을 목격했죠.” 고아라가 말을 이어갔다. “사부님이 주민등록증을 주시면 당장 하산할 거예요. 아마도 곧 낯선 남자와 만나서 혼인신고 하겠죠.” 육감이 발달한 만큼 그녀가 예견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며 절대 바꿀 수 없다. 그동안 변화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 이후로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낯선 남자?” 고정태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내 눈앞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또렷한 이목구비 덕분에 태어날 때부터 미인형에 속한 그녀는 까맣고 반짝이는 커다란 눈이 매력 포인트였으나 가끔 오금이 저릴 정도로 눈빛이 날카로울 때가 있었다. 25살 꽃다운 나이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번화한 도시에 남아 있는 대신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우진산은 풍경이 아름답고 나무가 울창하여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산기슭 마을은 이미 현대화가 되어 전부 아스팔트 길이 깔려 있다. 게다가 집마다 차를 보유하여 이동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아무도 산에서 생활하는 두 사제를 방해하지 않았고, 다행히 본인의 얄팍한 점술 지식에 고아라의 귀신 보는 능력과 뛰어난 육감 덕분에 마을 주민의 어려움을 해결해줘서 존중을 한 몸에 받았다. 30년 동안 산에 있으면서 다들 그가 ‘속세에 얽매이지 않은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을 주민도 도움을 받는 대가로 사제를 지켜줬기에 우진산의 일목일초를 건드리지 않았다. 고아라는 태생이 특이한지라 친구가 단 두 명뿐이다. 현재는 모두 인하시에 출근하며, 평소 휴대폰으로 연락하는데 가끔 직접 운전해서 시내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없다. 지금까지 만난 남자 중에서 그녀는 미래의 남편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어차피 짝이 될 사람도 아닌 데 굳이 시간 낭비하게 연애하면서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니 고정태는 놀라기 마련이었다. “사부님, 전 남자친구가 없잖아요. 혼인신고를 오늘 하게 되니까 당연히 초고속으로 결혼하는 셈이죠.” 고정태가 할 말을 잃었다. “아라야, 만회할 방법...?” 애제자가 25살이 되도록 애인을 만나지 못했는데 어찌 혼사가 걱정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낯선 남자와 번갯불에 콩 볶듯 결혼시키는 건 싫었다. “없어요.” “그럼 어떻게 생긴 줄은 알아?” 고정태도 그녀가 예견한 장면은 당일에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건 하느님의 뜻이라 두 사제는 한낱 인간으로서 운명을 거스르는 능력은 없었다. 비록 고아라는 어려서부터 귀신을 보고 육감까지 타고났지만 명리학에는 문외한이다. 유년 시절을 귀신과 함께 보냈어도 점을 보거나 죽음을 인도하고 관리하지는 못했다. 단지 산속에 틀어박혀 인터넷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야매 작가로서 한 달에 고작 100만 원 언저리에 불과한 원고료를 받았다. 한가할 때 꽃을 키우고 텃밭을 가꾼 덕분에 집 앞 마당은 어느새 정원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고정태는 그녀가 받는 원고료가 너무 적다고 일자리를 찾으러 하산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고아라는 회사에 입사해서 죽은 원혼을 보게 되면 더는 일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회사를 떠났다고 했다. 결국 직장을 여러 번이나 옮기고 나서 취직할 생각을 아예 접었다. 차라리 산으로 돌아가 사부님을 모시고 소설을 쓰면서 생활비나 벌기로 마음먹었다. 가끔 그를 따라 마을로 내려가 문제를 해결해주면 소정의 수고비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어차피 산에서 먹고 살 걱정은 없으니 저금만 조금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부자가 될 운명이 아닌데 목을 맨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고, 팔자를 타고 난 사람은 시기가 다가왔을 때 기회만 잘 잡으면 승승장구하기 마련이다. “아니요. 몰라요.” 고정태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예견한 미래는 보통 단 몇 초뿐인 장면에 불과했고, 그 이상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육감을 통해 예측한 단서로 혼자 탐색하고 실천해야 할 때가 많은데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력은 없었다. 10분 후. 고정태는 주민등록증을 꺼내 고아라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만약 남자가 별로이면 초고속으로 결혼하고 이혼해버려.” 고아라가 대답했다. “최소한 함께 지낸 시간이 있어야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겠죠. 성격이 영 안 맞으면 이혼할게요.” 혼인신고를 앞두고 아직 수속도 하지 않았는데 이혼부터 운운하는 사람은 고정태와 고아라밖에 없을 것이다. 이내 그녀는 주민등록증을 건네받아 가방에 넣었다. 작은 가방 안에는 휴대폰과 몇만 원 현금도 들어 있었다. “사부님, 그럼 가볼게요.” “그래, 얼른 다녀와.” “네.” 고아라는 마당을 지나 입구에 이르러 대나무 문을 열었다.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가 전부 대나무로 되어 있는지라 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고정태는 제자의 점을 봐주려고 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아라의 사주는 베일에 싸였다. 매번 운세를 보려고 할 때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어쩌면 아직 수행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른다. 물론 고아라를 데리고 유명한 점술가를 찾아가서 운세를 봐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워낙 특별한 케이스인지라 괜히 들통나서 나쁜 짓을 하는데 이용당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결국 포기했다. 고아라의 말처럼 인생은 어차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으로 미리 내다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알고 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하늘이 점지해준 운명을 무슨 수로 바꾼단 말인가? 인간이 태어나서 어떤 풍파를 겪을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기에 차라리 현실에 순응하고 마음 편히 받아들이는 게 나았다. 고난은 누구나 겪기 마련이고, 순풍에 돛 단 듯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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