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전화를 받아 상대가 하는 말을 들은 육진수가 안색이 변하더니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신속하게 전화를 끊은 육진수가 옆에 선 설연우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그러더니 설연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설연우는 떠나가는 육진수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 육진수는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나 그녀를 버리고 훌쩍 떠나버렸다.
한편.
성주원이 설인아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성주원은 운전석에 앉아 차를 운전하고 있었지만 가끔 조수석에 앉은 설인아의 기분을 살피려고 힐끔힐끔 쳐다봤다.
자꾸만 말하려다 마는 성주원을 보며 난감해진 설인아가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성주원은 들켜도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오히려 헤벌쭉 웃었다.
“헤헤, 아니야. 그냥 네가 걱정돼서.”
“어때? 별문제 없지?”
설인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성주원이 덧붙였다.
“그런 남자 때문에 속 태울 필요 없어. 다리 세 개 달린 개구리는 못 찾아도 다리 두 개 달린 남자는 널리고 널렸다는 말이 있잖아.”
“내가 너한테 어울리는 좋은 남자들 소개해 줄게. 무조건 육진수보다 나아.”
설인아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갔다. 성주원을 믿을 바엔 차라리 자기 자신을 믿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고, 고맙다야. 정말 그런 남자가 있으면 너나 실컷 만나.”
소개라니, 하시훈이 알았으면 다리를 분지르려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무리 우수한 남자라도 절대 하시훈보다 나을 리는 없었다.
성주원은 설인아의 표정이 조금 나아지자 통쾌하게 웃었다.
“아참,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이지?”
설인아가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쓸어 넘기더니 창밖을 내다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돌아간다.”
오늘은 그저 사전 준비일뿐 구체적인 치료는 계속 침을 놓으면서 지켜봐야 했다.
“응. 그래. 너 지금 어디 살아?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성주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설인아가 잠깐 망설였다. 설인아는 지금 하시훈의 신혼집에서 살고 있는데 성주원에게 이를 알리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아직 하시훈과의 사이가 그렇게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골드 플라자까지만 데려다줘.”
성주원이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더니 앞을 가리켰다.
“오케이. 가자.”
...
이튿날, 혜성 그룹 자회사의 대표 사무실.
커다란 사무실은 인테리어가 심플했지만 하나같이 고급지고 비쌌다. 까만 가죽 소파는 라인이 선명했고 크리스털로 만든 정방형 테이블엔 경제 잡지가 몇 권 놓여 있었는데 커다란 통유리로 들어온 햇살이 테이블에 비쳐 눈 부신 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까만 슈트를 차려입은 하시훈이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기다란 손가락으로 파일을 살펴봤다. 예쁜 눈망울은 아무런 감정 없이 잔잔했고 온몸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똑똑.
하시훈이 입을 열었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하시훈의 비서 백지성이 안으로 들어와 하시훈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대표님, 지서훈 씨 퇴원했습니다.”
서류를 확인하던 지서훈이 멈칫하더니 덤덤하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퇴원?”
지서훈의 병이 기괴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제 퇴원한다는 건 나았다는 의미였다. 하시훈은 의문이 풀리지 않아 눈썹을 추켜세웠다.
백지성이 손에 든 자료를 하시훈의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네. 신의 청난을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하시훈의 예쁜 눈망울이 살짝 흔들렸다.
“청난이 나타났다고요?”
청난이 사라진 지는 몇 년이 되었다. 하시훈도 전에 백지성을 시켜 청난을 여러 번 찾아갔지만 소식이 없었는데 청난이 바로 지씨 가문을 도우러 갈 줄은 몰랐다.
‘지씨 가문과 청난, 무슨 사이지?’
세계를 뒤흔들만한 큰 인물은 전부 특별히 신경 써야 했다.
백지성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하시훈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우물쭈물하는 건 백지성에게 어울리지 않았기에 하시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하시훈의 비서로 살아남으려면 결단력이 제일 중요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면 하시훈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백지성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발끝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신의 청난 말인데요. 사실은...”
하시훈이 칼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로 백지성을 쏘아봤다. 한순간이었지만 하시훈을 감도는 기운이 몇 도는 차가워진 것 같았다.
“백지성 비서.”
하시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포스가 사람을 옥죄었다. 이건 화났다는 의미였다.
백지성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더는 숨길 엄두가 나지 않아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될 대로 되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신의 청난이 바로 사모님입니다.”
하시훈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버렸다. 설인아가 청난이라니, 백지성은 하시훈이 캐묻기 전에 오늘 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얘기했다. 심지어 육진수가 포기하지 않고 쫓아와 설인아를 괴롭힌 것도 다 털어놓았다.
백지성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하시훈이 화내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하시훈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진수는 설인아가 결혼하기 전에 만나던 남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백지성이 고개를 들어보니 하시훈은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었다. 백지성은 의외의 모습에 순간 넋을 잃었다. 도대체 무슨 원인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하시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나가보세요.”
백지성은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하시훈에게 인사하고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하시훈은 몸을 의자에 기댄 채 팔꿈치로 테이블을 짚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가슴에 올려놓았다. 차갑기만 하던 하시훈의 두 눈이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역시 뭔가 다르다니까. 예전의 설인아가 아니야.’
...
호화롭기 그지없는 강수 별장에 어둠이 내렸다.
커다란 별장에 여러 비싼 가구들이 보였고 단조로운 색깔이 하시훈의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세련되면서도 대범했지만 어딘가 차가운 게 딱 하시훈 같았다.
조용하기만 하던 별장은 지금 주방에서 들려오는 여러 식기 소리로 가득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팩을 한 설인아가 손가락으로 크림을 펴 바르더니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주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진수성찬에 설인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주머니, 왜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혹시 맨날 입에 올리시는 그 도련님이 오는 거예요?”
유명자가 주방에서 수저를 꺼내 오며 활짝 웃었다.
“우리 사모님, 도련님 보고 싶은가 보네요.”
유명자의 말에 설인아의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지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설인아와 하시훈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니었기에 이런 화제가 나오니 얼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유명자가 수저를 가져다 놓더니 싱긋 웃었다.
“하하. 사모님,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유명자는 더는 농담할 엄두가 나지 않아 얼른 이 화제를 끝내며 공손하게 말했다.
“사모님, 천천히 드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부르시고요.”
유명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인사하며 물러갔다.
설인아가 두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톡톡 건드리더니 심호흡하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밥을 먹으며 핸드폰을 뒤적거리는데 마침 화면을 터치하자마자 전화가 들어왔다. 설인아는 1초 만에 받은 전화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우연도 기막힌데 하필 전화한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