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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그 말은 마치 주문처럼 차재욱의 귓전을 맴돌았다. ‘난 진이나를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왜 진이나랑 결혼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 죽을 것 같은 거지?’ 오히려 그는 머릿속으로 강서현과 함께 할때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그릴 뿐이었다. ‘설마 강서현에 대한 내 감정은 죄책감뿐만 아니라 다른 감정도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은 마치 넝쿨처럼 차재욱을 얽매이게 해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래서 살짝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일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차현승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때, 뒤에서 최금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난 너희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그때가 되면 결혼하고 싶지 않아도 결혼해야 할 거야.” 그 말에 차재욱은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강서현이 했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차현승을 임신 한 것이 전부 그가 꾸민 상술이라고 말했었다. 설마 그날 밤 그녀가 단순히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때문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에 차재욱은 최금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강서현과 함께 있던 그날 밤, 정말 우연이 일어난 사고인 거예요,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꾸민 거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잔뜩 당황한 최금희는 얼굴이 새얗게 질리고 말았다.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너희들이 술을 많이 마셔서 일어난 사고 아니었어? 게다가 강서현의 신분으로 아이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우리 가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겠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최금희의 모습에 차재욱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 일이 어머니의 계략이 아니었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가 강서현에게 지은 죄는 영원히 갚을 수 없을 것이다. 이튿날 이른 아침, 차현승은 침대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불로 몸을 꽁꽁 감싸기도 했다. “아빠. 열이 나서 학교에 못 갈 것 같아요.” 차재욱이 그의 이마를 짚어보니 정상 체온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는 차현승이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차현승. 사내대장부로서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해. 잘못을 저지르는 건 두렵지 않지만, 꼭 자기 잘못을 직시해야 해. 알겠어?” 그 말에 차현승은 작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전 그 여자 앞에서 사과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은 네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담임 선생님이야. 어떤 신분이든, 네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을 지켜볼 필요가 있어.” 그러자 차현승은 굴복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자 마음에는 그 벙어리밖에 없어요. 그 여자는 저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요.” “차현승. 남의 허물을 찌르는 건 가장 큰 무례야. 내가 전에 가르치지 않았어?” 차재욱이 잔뜩 화가 난 것을 보고 차현승은 감히 더 이상 대들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나서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아빠도 그 벙어리 편을 들고 있어. 그 벙어리가 자기 딸도 아닌데. 쳇.” 학교에 도착한 차현승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장우현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그는 반성문을 강서현에게 던져버리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강서현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현승. 올라와.” 그 말에 차현승은 짜증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 “네가 사과를 하는 태도가 단정하지 못하니, 이곳에 올라와 다시 한 번 이 반성문을 친구들 앞에서 소리 내 읽고 우현이한테 용서를 빌어.” 이 말에 차현승은 화가 나서 눈시울을 붉혔다. “저한테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전 이미 사과했어요. 그런데 제가 또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거예요?” 그러자 강서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때문에 우현이 병이 더 악화되었어. 그냥 대충 사과 한 마디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최소한 우현이의 용서를 받아야 해.” “싫다고 하면요?” “그럼 아빠한테 데리러 오라고 해. 사과할 준비가 됐을 때 다시 학교에 오고. 어쨌든 넌 똑똑하니까, 요즘 우리가 푸는 수학 문제 정도는 다 할 줄 알아서 집에서 며칠 쉬어도 문제 없을 거야.” 강서현은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꺼내 차재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를 본 차현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퉁명스럽게 단상으로 걸어가 강서현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읽으면 되잖아요.” 그렇게 차현승은 반성문을 들고 반 친구들 앞에서 한 번 낭독한 뒤 장우현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장난치려고 그랬어. 네가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줄도 몰랐고. 너한테 상처를 입혀서 미안해. 부디 용서해줘.” 차현승의 사과에 장우현은 총애를 받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난 이미 용서했어.” 이 말에 차현승은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강서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만족해요?” “그만 들어가봐.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반 친구들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 앞에서 사과해야 할거야.” 차현승이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것을 보고 학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너도나도 의론을 펼치기도 했다. “선생님은 너무 대단한 것 같아. 차현승까지 말을 잘 듣게 하다니?” “예쁘고 강의도 잘하는데다 아이들을 차별하지도 않아. 예전 담임 선생님처럼 편애하지 않아서 난 지금 담임 선생님이 아주 마음에 들어.” 친구들의 의론 소리를 듣고 있던 차현승은 화가 나서 끙끙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좋으면 너희들 엄마로 삼던가. 그녀가 너희를 버렸을 때에도 그렇게 좋아하는지 어디 한번 지켜볼거야.”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장우현의 옆에 앉아있던 한 여자 아이가 책상 밑으로 작은 머리를 쑥 내밀고 까만 눈동자로 차현승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차현승은 한눈에 이 여자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차현승은 콩이를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콩이가 깜짝 놀라 울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강서현에 대한 복수인 셈이다. 하지만 콩이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차현승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콩이의 웃는 모습은 아주 귀여웠다. ‘쳇.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나쁜 건 아니겠지? 내가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왜 나를 향해 웃어주는 거야?” 그렇게 차현승이 갑갑해하는 사이, 장우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콩이를 의자 위로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콩이를 다독였다. “동생아. 움직이지 마. 선생님이 곧 수업을 시작하실 거야.” 그 말에 콩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연필과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편, 차현승은 조금 전에 장우현이 콩이를 ‘동생’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우현… 네가 뭔데 콩이를 동생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번 수업에서 강서현은 각기 다른 유형의 수학 올림피아드 문제를 해설하고 있었다. 이번 문제들은 전부 참신한데다 문제 풀이 방식도 교묘했다. 차현승은 강서현이 밖의 학원 강사들보다 강의를 훨씬 더 잘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서현의 강의는 그의 생각을 많이 열리게 했다. 수업 중에 간단한 테스트 문제를 풀었었는데, 그는 뜻밖에도 만점을 받게 되었다. 강서현은 손에 든 답안지를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조금 전에 가르친 것은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은 문제들이었어. 그렇지만 보아하니 우리 반 친구들은 전부 잘 이해한 것 같아. 아마 이번 전국 수학 경시 대회에서 우리 반은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둘 것 같아. 특히 차현승 학생, 현승이는 조금 전 테스트에서 만점을 받았어. 아주 대단해. 자, 모두 현승이한테 박수를 쳐줄까?” 그 말에 아이들은 일제히 차현승을 바라보며 힘껏 박수를 쳤다. ‘역시 차현승이야. 싸움도 잘 할 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하다니.’ 반의 최고점은 70~80점인데 차현승은 만점을 받은 것이다. 콩이도 덩달아 손바닥이 붉어질 정도로 박수를 쳤다. 수업이 끝나는 벨소리를 듣고, 콩이는 바로 의자에서 내려왔다. 차현승 곁으로 달려간 콩이는 그의 손바닥을 잡아당기더니 초콜릿 한 조각을 건넸다. 차현승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콩이의 큰 눈을 바라보자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건네받았다. “네가 울까봐 마지못해 받은 거야.” 그러자 콩이는 매우 기뻐했다. 잠시 후, 콩이는 짧은 다리로 장우현의 곁으로 달려가다. 장우현은 허리를 굽혀 콩이를 품에 안고 콩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만지작거렸다. “이따가 오빠랑 운동장에서 놀자, 어때?” 이를 본 차현승은 손에 쥔 초콜릿이 녹을 정도로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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