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송서윤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벽에 기댄 채 약통을 손에 꽉 잡고 있었다. 꽃가루가 그 안에 빨려 들어가면 안 되니까.
다만 잠시 휴식하기도 바쁘게 귓가에 육지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이렇게까지 지아를 겨냥해야겠어? 우리한테 금방 이 꽃들을 보내왔는데 그새를 못 참고 죄다 엎어버려야 하냐고?!”
잇달아 김인우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윤아, 너 요즘 대체 왜 이래? 적당히 하자 제발! 아예 딴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고.”
두 남자의 말을 들으며 송서윤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둘에게 터놓고 싶은 말이 한가득했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눈시울만 붉혔다.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너희가 변한 걸까?”
“나 천식에 꽃가루 알레르기 있는 거 다들 잊었어?”
나약한 목소리에 기운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두 남자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전에 둘은 송서윤이라면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잘 챙겨줬었다.
매번 천식이 발작할 때 가장 조급한 사람은 바로 육지완과 김인우 두 명뿐이었다. 학교를 땡땡이치더라도 담장을 뛰어넘어 그녀에게 달려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병시중을 들었다. 따뜻한 찻물, 따뜻한 수건, 두꺼운 이불까지 덮어주며 그녀의 옆에서 24시간 대기할 정도였다.
다만 이젠 이토록 중요한 사안을 새까맣게 잊었다니.
육지완은 드디어 제 잘못을 인지했는지 표정이 굳어지다가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안.”
김인우도 바짝 긴장하면서 그녀를 쳐다봤다. 전에 송서윤이 병이 발작할 때마다 둘은 수없이 병시중을 들어왔기에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가까이 다가서며 송서윤에게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진 거야? 미안해. 이 꽃들은 지아가 야외에서 직접 따온 거라 그 애 성의가 깃들어 있어서 아까 참지 못하고 그만...”
송서윤은 침묵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약을 먹고 서서히 생기를 되찾는 걸 확인하고는 육지완과 김인우 모두 꽃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두 남자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의 불도 줄곧 켜지지 않았다.
송서윤은 그런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짐만 열심히 쌌다.
짐 정리를 거의 마친 후에야 그녀도 슬슬 이 집을 내놓기로 했다.
애초에 송서윤이 먼저 이 집을 샀고 나중에 육지완과 김인우가 그녀와 꼭 붙어있겠다고 하면서 양옆 건물을 사서 벽을 뚫은 후 현재 이 모양이 되었다.
즉 이 집 안의 3분의 1만 그녀에게 속한다.
이 상태로 집을 팔려고 하니 살짝 번거로울 따름이었다.
이날,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 두 남자는 마침 집 보러 온 부동산 직원과 마주쳤다.
낯선 남자가 집안에 나타나자 육지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누구세요?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안녕하세요, 사장님들. 저는 부동산에서 왔어요. 다름이 아니라 이 집 주인이 집을 내놓았거든요.”
‘집을 내놓았다고?’
육지완과 김인우는 서로 마주 보면서 놀라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둘이 이제 막 부동산 직원을 내쫓으려 할 때 송서윤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내가 내놓겠다고 했어. 마침 잘 왔네. 너희한테도 얘기하려던 참인데.”
두 남자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팔아? 잘만 살고 있었잖아.”
김인우는 문득 그날 일을 되새기며 연유를 알겠다는 듯 돌직구를 날렸다.
“아직도 그날 일로 화가 덜 풀린 거야?”
당황한 이 남자가 간만에 사과했다.
“우리도 네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일부러 깜빡한 게 아니잖아. 꼭 이렇게까지 모질게 나와야겠어?”
이에 송서윤이 차분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날 일과 전혀 상관없어.”
‘다만 너희 둘이랑 상관있지. 더는 너희랑 엮이고 싶지 않거든.’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끝내 입밖에 내뱉지는 못했다.
“나 사직한 건 알고 있지? 나중에 새 직장 찾으면 계속 여기서 지내기 불편할 거야. 게다가 우리도 수년간 함께 지냈으니 더는 매일 붙어 다닐 필요가 없잖아.”
그녀의 말을 들은 육지완은 여전히 음침한 얼굴로 반박했다.
“새 직장 때문이라면 출근할 때 나랑 인우가 픽업해줄 테니 걱정할 거 없어. 너도 말했다시피 우리랑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서로 적응해왔는데 왜 갑자기 떠나려고 하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나랑 지완이도 있고 정 안 되면 기사를 고용해줄게. 이대로 떠나는 건 난 반대야.”
김인우도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남자를 설득할 수 없게 된 송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그래? 그럼 일단 이 집 팔고 나중에 좀 더 큰 집으로 사자. 그때 가서 지아도 함께 데려와서 지낼 수 있잖아.”
서지아를 언급한 순간, 아니나 다를까 두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김인우가 끝내 이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고 선뜻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난 오케이.”
한편 생각이 많은 육지완은 복잡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 지아도 데려오길 원해?”
그는 왠지 모르게 이번 일이 생각처럼 단순한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기도 전에 송서윤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리 다 친구인데 함께 지내면 좋잖아.”
그녀가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이 집 팔고 새집 사.”
육지완과 김인우도 이번엔 침묵만 지킬 뿐 더는 반대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