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서찬미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졌다.
“왜요?”
“대표님은 오늘 사모님과 동행하시니 서찬미 씨와 함께 참석하긴 곤란한 상황이에요.”
서찬미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아, 그분과 함께 참석하시는 거군요. 너무 잘 됐다... 저도 처음부터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잘됐네요.”
서찬미는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꼭 잡은 채 입술을 깨물었고 뒤에 있던 룸메이트들은 서로 눈을 쳐다봤다.
“찬미야, 설마 남친이 너 바람 맞혔어?”
“오늘 만찬 국제적인 파티라고 네 남친이 일부러 너한테 해외 기업가들 소개해 주기로 한 거 아니였어?”
의심의 눈초리에 서찬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중요한 고객님과 참석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가면 신경 쓰일 거잖아.”
서찬미는 고개를 숙여 드레스를 내려다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박시언은 분명 신다정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 갑자기?
서찬미는 드레스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대하고 기다렸던 파티를 이대로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박시언은 비서에게 화려하고 단정한 검은색 프렌치 드레스를 신다정에게 보냈다.
신다정이 드레스로 갈아입는 동안 박시언은 이미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단장을 끝낸 그녀는 천천히 위층에서 내려왔다.
비록 저번에 와인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다정의 모습을 보긴 했었지만 오늘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도 박시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예전에는 왜 그녀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몰랐던 걸까?
“준비 끝.”
신다정이 고개를 들자 박시언은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
“이 비서가 대기하고 있어.”
별장 문을 여는 순간 이 비서가 보였다.
신다정의 아름다운 모습에 이 비서도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모님 드레스가... 서찬미 씨가 입은 것만 훨씬 아름답습니다.”
서찬미의 이름이 나오자 박시언은 이 비서에게 눈총을 주었고 그제야 이 비서는 다급히 입을 닫았다.
“괜찮아요.”
신다정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박시언은 이 비서를 노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달 보너스는 없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
이 비서는 서러웠지만 감히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괜히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파티 회장에 도착한 뒤, 박시언은 신다정을 부축하고 차에서 내렸는데 사람들은 분분히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박 대표님 파트너 누구지?”
“한성 그룹 사모님 아니야?”
“전에 한 번도 동행한 걸 본 적 없는데? 근데 두 사람 정말 선남선녀다.”
...
이때 박시언은 아예 그녀의 손을 꼭 잡았고 그녀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워낙 보는 눈이 많아서 하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니 지난 생에 보았던 얼굴이 많이 보였다.
박시언은 확실히 비즈니스계에서 어느 정도 명성이 있기에 오늘과 같은 이런 국제적인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업계 최고의 기업가나 자선가 혹은 부동산 거물들이다.
지난 생에 신다정은 박시언의 환심을 사려고 특별히 금융을 공부했지만 딱히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유리 깨지는 소리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정원사 노인이 부주의로 장미꽃을 가득 담고 있던 꽃병을 깨버린 것이다. 파티 회장의 책임자는 노인을 한바탕 꾸짖었다.
“이 영감이 진짜! 당장 이 영감 쫓아내!”
“잠깐만요”
이때 신다정이 앞으로 나아가 바닥의 장미꽃을 주워들었는데 이 장미들은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탔는지 가시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게다가 품종도 아주 희귀했다.
“사모님, 이 영감이 지 회장님이 모두를 위해 준비한 꽃을 망가뜨리고 소란을 피웠으니 당장 쫓아내겠습니다.”
“실수로 깨셨으니 새 꽃병을 준비하면 될 일이에요. 근데 지 회장님이 특별히 모두를 위해 준비하신 거라면 이렇게 감상만 하기엔 너무 아쉬울 것 같은데. 차라리 모든 여성분이 한 송이씩 손에 들고 지 회장님의 마음을 느끼는 건 어떨까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고 책임자도 눈치 있게 노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때 박시언이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위기 살릴 줄도 알았네.”
신다정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 회장님한테 잘 보이려고.”
파티 회장 외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서찬미가 택시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의 괴이한 시선을 받았지만 그녀는 오직 여길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입구의 경비원은 서찬미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방금 떠난 택시와 번갈아 보며 물었다.
“초대장 있으실까요?”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서찬미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녀는 오늘 파티에 초대장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에는 늘 박시언과 함께 오다 보니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라졌다.
“죄송하지만 초대장이 없으면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저 박시언 대표님 파트너예요.”
서찬미는 대충 거짓말을 했고 경비원은 서찬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박시언 대표님은 이미 사모님과 함께 입장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쪽은?”
주변의 시선을 눈치챈 서찬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때, 밖에 있던 이 비서는 서찬미를 발견하고 다급히 다가갔다.
“죄송해요. 우리 회사 직원이에요.”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서찬미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찬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이 비서는 엄숙하게 말했다.
“서찬미 씨가 여긴 어떻게 오셨죠?”
“그게... 전에 대표님이 저 배짱이 부족하다고 하셔서 배짱도 키울 겸 왔어요. 저 몇 달 후면 출국할 텐데 이런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친하고 싶어요. 이 비서님, 저 좀 데리고 들어가면 안 될까요?”
이 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도 빨리 배워서 대표님에게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지난번에 사모님이 2조 원에 낙찰받은 그 땅 말이에요. 그건 완전히 손해예요. 오늘 금융계의 거물들이 다 참석하는데 금융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모님이 옆에 계신다면 대표님도 감당하기 힘드실 거잖아요.”
서찬미의 진지한 말에 결국 이 비서는 묵인했다.
신다정이 금융을 모르다 보니 매번 박시언 옆에는 서찬미가 함께 했기에 이 비서도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다.
서찬미는 활짝 웃으며 파티 회장으로 들어갔는데 첫눈에 멀지 않은 곳에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박시언을 보았다.
드레스 자락을 들고 뛰어 들어가려는 그때, 그녀는 한 노인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바로 아까 그 정원사 노인이다.
순간 꽃병이 떨어지며 안에 가득했던 물이 서찬미의 드레스 자락에 쏟아져 버렸다.
서찬미는 저도 몰래 비명을 지르며 더럽혀진 드레스 자락을 이리저리 보더니 사나운 표정으로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길 안 보고 다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