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지진욱의 행동력은 아주 빨랐다. 오후 3시, 정지연도 그녀의 몫인 혼인신고서를 받았다.
정지연은 손에 들린 서류를 확인했다. 그녀와 주민환은 같이 찍은 사진마저도 합성으로 붙인 거라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그녀와 주민환은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 거물은 그녀가 있는 A 대에 자주 기부를 하는 편이었다. 지난달에도 1400억가량을 기부하기도 해 그녀가 있는 학과에도 연구비를 일부 받게 되었다. 얼마 전에 경비 신청을 제출했고 주임 교사는 그 기부금에서 나눠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회에도 투자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월초에 그녀가 이끌던 팀은 전국구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바로 주민환이 시상을 해주었다. 당시 그 거물은 한마디 칭찬을 하기도 했다.
‘정 교수님, 또 한 번 우승을 거머쥐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류의 국내외 대회에서도 전부 그가 시상을 했었으니 두 사람은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때, 별안간 휴대폰이 울렸다. 꺼내보니 은행 어플의 알림이었다.
와우!
2억이 이체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입금자는 바로 주민환이었다….
요즘은 다들 자각과 실천력들이 이렇게 뛰어나나?
이제 혼인신고 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생활비도 보내는 거지?
잠시 멈칫한 정지연은 그에게 문자를 보내려 했지만, 그의 카톡도 없다는 걸 알아챘다.
카톡은 물론 연락처도 몰랐다.
그래, 이 결혼은 확실히 성급했다.
카톡을 확인하니 주민환의 할머니인 유순옥의 메시지였다.
순옥 할머니:지연아, 어떻게 됐니? 민환이가 오늘 혼인신고 한 댔는데, 끝났니?
정지연은 잠시 고민하다 아예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곧바로 연결이 됐다.
“어떻게 됐니, 지연아?”
“할머니, 혼인신고 이미 끝냈어요.”
“정말 잘됐네! 보름 동안 3키로 빠진 보람이 있어!”
이 녀석과 자기 손주를 만나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끝내 손주 녀석은 닦달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받아주었다.
비록 주민환은 내켜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지연의 매력이라면 자신의 손주가 넘어가는 건 시간 문제라고 굳게 믿었다.
정지연은 그녀가 여러 방면에서 고심해서 살펴본 사람이라 밖에 있는 다른 여자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들 주씨 가문에는 이런 여자애가 미래의 안주인 자리에 앉아야 했다.
“나도 이제는 먼저 간 영감 볼 낯이 있겠어. 우리 주씨 가문은 대대로 경영을 해서 우리 영감이 늘 똑똑한 며느리 들이고 싶어 했단 말이야. 이제 드디어 그 양반 꿈을 이루어줬어….”
정지연은 그 말에 침묵했다.
똑똑한?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주민환도 엄청난 엘리트로 A 대의 졸업생인 데다 석박을 연속으로 취득한 학생이었다.
“그 자식이 언제쯤 같이 살자는 얘기 안 하던?”
“월아 센트의 키를 주면서 며칠 뒤에 들어오라고 했어요.”
“월아 센트? 그… 그래…. 지연아, 걱정 마, 우리 집안에 들어온 이상 절대로 그 누구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하마. 난 너랑 민환이가 아주 잘 살 거라고 믿어.”
여사님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녀와 주민환이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녀는 눈앞의 이 인자한 할머니가 너무 고마웠다.
“둘이 결혼도 했다니까 더는 방해하지 않으마. 부부끼리 좋은 시간 보내고 얼른 이쁜 손주나 안겨주면 돼. 난 T 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 끊어서 공항 가봐야 하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여사님은 지난번에 손자의 결혼 연을 빌었는데 하늘이 바로 이렇게 뛰어난 손자며느리를 주었으니 당장 보답을 하러 갈 생각이었다.
정지연은 그런 여사님에 할 말을 잃었다.
여전히 호탕한 성격의 여사님은 재계에서 이름을 널리 떨치던 명장이라고는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
정지연은 A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 업무가 아주 많았다. 특히 큰 실험도 금방이라 며칠이고 사무실이며 연구실에 박혀 있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그리하여, 며칠 뒤라는 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정지연은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마저도 잊은 듯했다. 그러다 주말 오후가 되었고, 친구인 심아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미친! 드디어 전화 받았네! 이번에도 안 받으면 아예 실종 신고할 생각이었어!”
“무슨 일이야?”
정지연은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데이터들을 챙겨 사무실로 돌아왔다.
심아영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너 오늘 무슨 날인지 잊은 건 아니지?”
정지연이 막 전화를 끊으려는데 전화 너머로 심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끊지 마, 끊지 마! 모임, 잊었어? 언제 올 거야? 지금 차 보내줘?”
오늘은 그들의 중학교 교장, 지씨 가문 어르신의 환갑 잔치 날이었다. 지씨 가문 어르신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 피아니스트로 덕망이 높아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정지연은 그제야 그 일이 떠올랐다.
“괜찮아, 알아서 갈게.”
“그래, 잊지 말고 차려입고 와. 오늘 다들 하나같이 힘주고 와서는 선생님한테 최근 업적들 보고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야. 너 이제 막 귀국한 참이니까 제발 너무 수수하게 오지 마. 특히….”
심아영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들어보니까 서진하랑 문유설도 Z시로 돌아왔다. 걔네도 오늘 파티에 참가한대. 게다가 오늘 이 파티는 서….”
“알았어.”
정지연은 담담하게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소위 파티라는 건 매번 서로 비교나 해대서 큰 의미가 없었기에 정지연은 이런 파티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지 회장이 몇 번이나 연락을 했던 탓에 아무래도 체면은 살려주어야 했다.
지 회장의 생신연이 열리는 임페리얼 호텔은 Z시에서 가장 호화로운 고급 호텔 중 하나였다.
정지연은 수업이 끝난 뒤 곧바로 파티에 찾아간 탓에 차려입을 시간이 없어 간단한 캐쥬얼 정장 차림이었다. 비록 거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실례는 아니었다. 옅은 화장에도 차갑고 아름다운 분위기는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파티장은 떠들썩했다. 그 누구도 정지연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는 주인공이 등장할 때까지 적당한 곳에서 쉬려고 했다.
막 베란다 쪽으로 향하는데 안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 몇 명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채 조롱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서서 그 여자들의 아첨을 받는 샴페인 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바로 슈퍼모델에서 배우로 전향한 뒤 웹드라마 몇 편 찍고 인기가 급상승한 문유설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붐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유설은 슈퍼모델일 뿐만 아니라 문씨 가문에서 최근에야 다시 되찾게 되어 온 가족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진짜 재벌가 자제이기 때문이었다.
“정지연이 뭐라도 된대? 당시에 아기가 뒤바뀌면서 아가씨의 자리를 공으로 몇 년이나 누른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뻔뻔하게 남의 인생을 차지해서 누리다니. 문씨 가문이 아니었으면 별 볼일도 없었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