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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번에는 글이 아닌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박민재가 잠든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유송아를 끌어안은 채 깊이 잠든 듯 보였다. 유송아의 얼굴에는 수줍은 듯한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부은 입술이며, 풀어헤친 잠옷 깃 사이로 이어진 키스 마크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강서우는 박민재와 함께한 5년 동안 단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 어릴 적 박민재가 욕망을 이기지 못하겠을 때면 강서우를 꽉 끌어안고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사랑아, 빨리 어른이 되어줘.”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자, 박민재는 더 이상 그렇게 안아주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 해도 충분하다며 달래듯 말했을 뿐이었다. 강서우는 그걸 아껴주고 존중해주는 사랑이라 믿었다. 그러나 욕망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면이라는 사실을, 강서우는 이제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강서우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것처럼 아려 왔다. 마치 살점을 도려낸 듯 쉬이 아무러지지 않을 상처였다. 식사를 마친 뒤, 강서우는 옆집 별장으로 향했다. 특별하게 지어진 다리를 건너면서 아래 가득한 꽃 무리를 내려다봤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량함뿐이었다. 이 두 채의 별장은 강서우와 박민재가 대형 계약을 성사시킨 뒤 전액 현금으로 구입한 곳이었다. 건물 명의는 강서우 앞으로 되어 있었다. 박민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결국 강서우의 것이라면서, 그녀의 이름으로 사는 게 뭐가 문제냐고 웃어넘겼다. 그리고 두 집의 정원과 다리를 연결해 달라고 전문가를 불러 특별히 공사를 맡겼다. 둘이 싸우다가 화라도 나면 멀리 친정에 가지 않고 바로 옆집에 가면 되니 말이다. 그는 그녀가 바로 코앞에서 보여야 안심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강서우가 하루 종일 눈앞에 있어도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넓은 별장은 꾸며져 있지 않은 전시관 형태로 되어 있었다. 커다란 진열장마다 어머니가 남긴 예술혼이 깃든 작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기 드문 귀한 도자 예술품도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강서우는 진열장마다 작품을 하나씩 채워 넣으면서 자신의 미래까지 박민재에게 맡겼었다. 하지만 이젠 직접 하나씩 싸 가기로 했다. 잃어버렸던 미래를 다시 스스로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서우는 손끝으로 진열장의 특수 제작 유리문을 쓸어보다가 가장 큰 진열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안에 놓인 것들은 모양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제각각 삐뚤삐뚤하고 조악해 보였다. 매년 어머니의 기일이 되면, 박민재는 강서우와 함께 수공예 도자기를 만들러 가고는 했다. “사랑아,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어머님이 제일 좋아하셨던 걸 같이 만들어볼게. 어머님도 분명 네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아실 거야. 그리고 점점 더 잘 지낼 거라는 것도 아실 테고.” 그러나 강서우는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흙조차 온전하게 다루지 못했을 정도다. 당시 박민재는 지금처럼 대단한 대표가 아니었고 큰돈을 쓸 여유도 없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공방 주인에게 사정하며 강서우가 마음껏 도자 만들기에 몰두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 강서우의 실력이 점점 나아졌지만, 박민재가 곁에서 보내주는 시간과 인내심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강서우는 진열장을 열고 그 안에서 가장 예쁘게 채색된 단지를 꺼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장식 글씨로 새겨져 있고, 그사이에는 유치할 만큼 단순한 하트가 있었다. 그날 박민재가 강서우 손을 잡고 함께 글씨를 적어 넣었을 때, 그는 들뜬 기색으로 강서우의 귓가에 살짝 입 맞추었다. “사랑아, 이제 어머님 앞에서 도장 찍었으니 날 모른 척하면 안 돼?”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묻어 있었다. 강서우가 소중히 간직해온 그 모든 추억은 이제 우스운 농담에 불과해졌다. 그녀는 손아귀 힘을 풀었다. 단지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머릿속에서 알록달록 빛나던 기억의 거품들이 톡 하고 터지더니 그대로 바람에 흩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 그렇게 하나하나 정리해 트럭에 싣고 보니 어느덧 오후 4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강서우는 부동산 중개인을 불러 집을 보여주고 관련 서류와 가격을 확정 지었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매물로 등록해달라고 당부했다. 모든 일을 마친 강서우는 곧장 택시를 타고 교외 농장으로 향했다. “정말 돌아갈 거니?” 고모 강혜영은 아쉬운 눈빛이었다. “너랑 민재가 한 몸처럼 붙어 다니길래, 난 둘이 꼭 잘 살 줄 알았는데.” 강서우는 답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흔들의자에 몸을 기댔다. 귓가에는 박민재가 자전거 방울을 울리던 소리가 아른거렸다. 그리고 곧 밝고 청량했던 소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랑아, 우리 늦었어! 빵이랑 우유 챙겼으니까 빨리 와!” 강서우는 머릿속에서 그 기억을 억지로 떼어내고, 과일을 썰어주고 있는 강혜영을 바라보았다. “고모, 남자 때문에 강씨 가문을 떠나고 나서 후회한 적 있어요?” 강혜영은 잠시 칼질을 멈추더니 이내 다시 과일을 썰기 시작했다. “네 남동생이 생겼잖니.” 그게 후회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 강준하가 강혜영에게도 정략결혼을 강요했다. 그때 강혜영은 다른 남자와 함께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가문 족보에서는 이름이 지워졌고, 출산 직전에 그 남자는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어린 남동생이 대학생이 되었지만, 강혜형은 끝내 운명을 걸었던 그 남자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강혜영은 손을 씻고 돌아와 강서우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네 아버지가 억지 부려서 그런 거라면 굳이...” “그건 아니에요. 민재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났어요.”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가 뜰 안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강혜영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서우는 다시 흔들의자에 몸을 기댔다. “저는 어머니 납골함을 절대 경자당에서 빼지 않을 거예요.” 강서우는 아버지가 못된 사람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무정할 줄은 몰랐다. 강준하는 내연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강혜영처럼 강서우 역시 가문에서 제명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강서우 어머니의 납골함도 경자당에 빼겠다고 했다. 정말 치졸하고 참담한 일이었다. 떠나기 전, 강혜영은 노란색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전에 네가 부탁했던 거야.” 강서우는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그 주머니를 풀어봤다. 안에는 붉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날짜가 쓰여 있었다. 강서우와 박민재가 열렬히 사랑하던 둘째 해, 강서우는 23살 생일만 지나면 곧바로 결혼하자고 약속했었다. 구름시에서 유일한 친척인 강혜영에게 부탁해 절에서 길일을 받은 것인데, 하필 계산된 날이 바로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강서우가 구름시를 완전히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과 같은 날짜였다. 이 얼마나 씁쓸한 아이러니인가. 강서우가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에서는 잔잔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유송아는 오렌지빛 조명 아래 우아한 선율을 그려내고 있었고, 박민재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한껏 집중한 얼굴로 그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아주 다정해 보였다. 강서우가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 유송아는 연주를 멈추고 환한 미소로 다가왔다. “언니, 이 곡은 VIN이 저를 위해 직접 작곡해 주신 거예요. 민재 오빠가 제가 국제 콩쿠르에 나가도록 준비해 줬는데, 잘할 자신이 없어서 언니가 한 번 들어봐 주면 좋겠어요. 괜찮죠?” 강서우는 유송아의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강서우도 이 여리고 순수한 모습을 믿었다. 드레스도 빌려주고, 바이올린도 가르쳐주고, 교내 콩쿠르에 지원하도록 용기를 주면서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런데 결국 유송아가 원했던 것은 단지 명예나 성적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박민재까지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강서우가 잠시 침묵하자, 유송아는 겁먹은 듯 고개를 숙였다. “언니, 제가 여기로 이사 온 것 때문에 화난 건가요?” 강서우는 얼굴빛이 굳어지며 바로 박민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송아 씨가 이 집에 들어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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