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다음 날, 첫 출근을 앞둔 강서우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정장 차림의 남자가 따뜻한 음식을 손에 들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서우 씨, 저는 문석천이라고 합니다. 대표님께서 아침 식사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방에는 여러 종류의 음식이 아직 모락모락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강서우는 조금 놀랐다.
지금 보니 이세빈은 소문과 다르게 아내인 그녀를 충분히 존중하고 세심하게 챙겼다.
박민재는 재산을 상속받아 돈이 차고 넘칠 때조차 비서를 시켜 그녀에게 아침 식사를 전해준 적이 없는데 말이다.
“고마워요. 이세빈 씨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그녀는 넉넉한 양의 아침 식사를 받아 들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다음 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택시를 타고 강성 그룹으로 가려는데 문석천도 따라 들어와 주차장으로 가는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대표님께서 강성 그룹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세빈의 이러한 배려에 조금 놀랐지만 호의를 거절하진 않았다.
강성 그룹.
어젯밤 이미 강씨 가문에서 큰아가씨가 입사한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오전 회의에는 강씨 가문의 친인척과 각종 주주, 경영진이 한자리에 모였다.
겉으로는 아가씨를 환영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기선 제압이었다.
그녀가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강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상의 끝에 네가 홍보팀 인턴부터 시작해서 업무를 배우다가 점차 회사 경영진으로 승진하는 게 적절할 거란 결론을 내렸어.”
강서우는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홍보팀은 회사의 최전선에서 여러 회사 대표를 접대하며 계약을 체결하는, 회사의 핵심 경영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서우의 나이면 한창 젊고 패기 넘칠 때인데 이러한 굴욕을 맛보면 당연히 발끈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강서우는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었다.
“논의 끝에 나온 결과라면 받아들일게요.”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강서우는 곧장 테이블을 에둘러 하이힐을 또각또각 밟으며 걸어 나가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 멈춰 서서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참석자들을 훑어보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분명 웃는 얼굴인데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 느낌은 뭘까.
회의실을 나선 강서우는 문밖에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던 문석천을 보며 놀라면서도 무기력한 표정을 지었다.
“강성 그룹 내부 업무는 대외적으로 비밀이라 자리를 비켜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앞으로는 회사 문 앞까지만 데려다주시면 돼요.”
“실례했습니다.”
문석천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한 뒤 자리를 떴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린 채 각자의 길을 갔다.
강서우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인데 강성 그룹 사람들은 벌써 조바심이 난 모양이다.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지루하게 앉아 있던 강서우는 가방을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가 오늘 아침 자신을 데려다준 문석천과 마주쳤다.
“강서우 씨,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강서우는 이세빈이 아내인 그녀에게 지나치게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 같아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차에 탄 강서우는 눈을 감고 쉬고 있는 상대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출퇴근 길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세빈은 천천히 눈을 뜨며 깊은 눈동자로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내 결혼 생활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내가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일일이 다 간섭하죠.”
이씨 가문이 워낙 대단한 집안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던 강서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버라인으로 돌아온 강서우가 이제 막 차에서 내리려고 발을 내딛는데 뒤에서 이세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같이 할아버지 뵈러 갈 생각인데 그쪽은 연기 잘해요?”
평온하게 묻는 어투에 강서우는 몇 초간 멈칫하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죠?”
갑자기 이세빈이 그녀의 손목을 잡자 소매의 얇은 천 사이로 그 손의 온도가 느껴졌다.
뜨거웠다.
수트 커프스가 무심코 그녀의 손등을 스치자 살짝 간지러웠다.
강서우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몸이 거의 굳어버린 강서우를 바라보며 이세빈은 그녀를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