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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김 집사보다 귀가 밝은 강도하는 문밖의 기척을 일찌감치 눈치챘고,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내 속으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감히 자신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친한 척하다니?! 임유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아들을 꼭 끌어안아 주기도 전에 귀청이 떨어질 듯한 호통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저리 비켜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갑자기 훌쩍 커진 아들 때문에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강도하의 목에서 그녀가 직접 만든 목걸이를 발견하자 금세 마음을 가라앉혔다. 겉모습만 성인이지 영원한 자신의 귀염둥이였다. 그리고 심호흡하고 다독이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하야, 이런 말 해도 믿기지 않겠지만...” 강도하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임유나를 지나쳐 뒤따라 들어서는 아버지를 향해 뛰어갔다. 20살이 된 청년은 벌써 아버지만큼 키가 컸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아무 여자나 찾는다고 해서 우리 엄마를 대신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그럴 만한 자격은 되고? 정녕 미쳤어요?” 심지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하긴, 일찌감치 제정신이 아니긴 했죠.” 부자라면 둘도 없는 사이일 텐데 마치 원수지간을 연상케 하다니, 분노로 이글거리는 강도하의 눈빛에 임유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시후는 태연한 얼굴로 임유나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당겨 팔짱을 끼게 했다. 이내 무덤덤하게 강도하를 향해 말했다. “서재에 가서 얘기해.” 물론 터무니없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일을 믿어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게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서재에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강도하는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저 여자를 집에 들이기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까지 지어낸 거예요?” 강도하는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의 반응을 보자 임유나의 머릿속에 문득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강시후는 정말 내 말을 믿어 준 걸까?’ “네 엄마 맞아.” 강시후는 임유나와 손깍지를 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는 진작에 돌아가셨어요!” 비록 속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제정신이 아닌 듯한 아버지의 모습에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눈앞의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를 바라보며 강도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친, 정말 정신이 나갔나 보네.’ “도하야, 혹시 아직도 우리의 비밀을 기억해? 아빠 생일 선물로 주려고 목걸이를 같이 만들었는데 뒷면에 이름을 새기기로 했잖아.” 강도하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엄마와 몰래 꾸민 일이긴 하지만... “당시 엿들은 가정부도 있으니까 물어보면 쉽게 알아내겠죠.” 강도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믿어줄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굳이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강시후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강조하며 말했다. “여자를 만나는 건 본인의 자유지만 엄마는 제발 건드리지 마세요. 여긴 우리 엄마 별장이니까 둘이 나가서 따로 살아요. 추억이 깃든 물건에 손가락 하나 까닥했다가 큰코 다칠 줄 알아요!” 어머니를 언급하는 순간 한층 누그러진 강도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독기로 가득했다. 괜히 궁지로 몰아넣었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른다. 앳된 얼굴은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냈고, 위협적인 모습은 마치 사지로 내몰린 늑대 새끼 같았다. 강도하를 바라보는 강시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임유나가 눈물이 글썽했다. 강도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디서 연기야!’ “도대체 그동안 아이를 어떻게 키운 거야? 이런 말을 내뱉는다는 자체가 아빠로서 충분한 안정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야. 우리 아들이 얼마나 착한 아이인데 애지중지하면서 키워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날이 선 모습이라니!”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아들을 떠올리자 임유나는 속상하기 그지없었다. ‘착한’ 강도하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냐하면 눈물을 훌쩍이며 손으로 아버지의 귀를 잡아당기고 호통치는 임유나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귀가 뒤틀릴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꼬집었다. 감히 아버지에게 손찌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욱이 아버지의 반응 때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에게 고분고분 붙잡힌 채 성을 내기는커녕 손을 뻗어 제지하는 대신 되레 화를 풀라고 나지막이 달래주기까지 했다. “화가 풀리게 생겼어? 열 받아 죽겠네! 이따가 저녁 건너뛰고 일단 애들이 무슨 상황인지부터 자세히 얘기해!” 임유나는 괜히 그를 불쌍하게 여겨 진작에 물어보지 않은 게 후회될 지경이었다. 강시후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낙엽을 쓸어버리는 가을바람처럼 ‘잔인’하다면 강도하를 돌아보는 순간 금세 따뜻한 봄바람을 연상케 하는 다정한 어머니로 변했다. “도하야, 물론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사실인데 어떡해? 나 진짜 네 엄마야. 그동안 곁에 있어 주지 못 해서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아가야.” 강도하는 속으로 눈앞의 여자가 연기한다고 생각했다. 강씨 가문에 빌붙기 위해서라면 다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근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하고 다시금 아가라는 호칭을 듣게 되자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 갑작스럽게 북받쳐 오르는 울컥하는 감정에 당황한 나머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임유나는 속상해서 연신 훌쩍이며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경각심이 높은 건 좋은 일이야. 내 머리카락 가지고 믿을 만한 기관에 DNA 검사 맡겨봐. 데이터는 거짓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동안 우리 모자만 알고 있는 게 뭐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중에 결과 보고서를 확인한 다음 다시 찾아와서 사실인지 물어도 되니까 엄마는 계속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임유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타일렀다. 성인이 된 아들은 꼬맹이 때와 다를 바 없었고, 눈빛과 행동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엄지손가락을 살짝 구부리는 미세한 동작을 캐치하는 순간 아들이 비로소 고집을 꺾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도하는 아버지의 주장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었다. 그리고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성큼성큼 다가가 머리를 집어 들고는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 아들이 떠난 후 임유나는 강시후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동안 세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었다.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블랙박스의 위치를 추적한 근처에서 승객들의 시신을 잇달아 발견했고,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탑승객 수십 명이 실종된 상태였다. 물론 임유나도 해당했다. 강시후는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직접 배를 타고 수색에 나섰고, 작업은 1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초반에는 강도하를 데리고 다녔지만, 선상 생활에 적응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서 다시 별장으로 돌려보내 베이비시터가 대신 돌봐주었다. 그리고 쌍둥이들은 유치원에 맡겨 24시간 전문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따라서 강시후의 삶은 일과 임유나를 찾는 것으로 나뉘게 되었다. 사람의 에너지는 정해져 있기에 결국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점점 멀어졌다. “강도하는 어렸을 때부터 기숙사 생활했고, 강로이와 강이안도 평소에는 학교에 다녔기에 10명의 개인 집사를 고용해서 아이들의 일상을 케어하도록 했어. 유나야, 내가 잘못했어. 이게 다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 내 탓이야. 이만 화 풀어, 응? 앞으로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면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강시후는 손을 뻗어 임유나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그녀가 실종된 후 강시후가 이렇게 엉망으로 육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은 엄마를 잃은 동시에 어떻게 보면 아빠의 사랑도 받지 못한 셈이었다. 임유나는 강시후를 서재에서 내쫓고 홀로 바닥에 앉아 지난 몇 년간 아이들의 사진, 성적표, 개인 집사의 기록 등이 담긴 캐비닛을 뒤적거렸다. 아이들에 관한 추억이라면 아무리 사소할지언정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서재에서 쫓겨난 강시후는 문 앞에 주저앉았고, 그나마 자리를 지켜야만 안심이 되었다. 그날 밤 강씨 본가 저택 별장은 밤새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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