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텅 빈 별장 안, 차서아는 소파에만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별장 대문이 열리고 윤건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윤건우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오늘 채린이 열 나서 아픈데 무슨 전화를 그렇게 많이 해대는 거야?”
차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윤건우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차서아는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땐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
“무슨 일? 여기 멀쩡하게 서 있으면서 대체 무슨 급한 일이 있다는 거야?”
윤건우는 그녀를 이해해주긴커녕 오히려 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채린이 아프니까 오늘 종일 함께 있을 거라고 말했잖아. 일부러 이러는 의도가 뭐야? 그런 윤리에 어긋나는 생각 따위 접으라고 몇 번을 말해? 난 네 삼촌이야. 우린 절대 불가능하다고! 앞으로 또 이런 일 있으면 그땐 그냥 이 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
말을 마친 윤건우는 위층으로 올라가 방 문을 쾅 닫았다.
한편 차서아는 여전히 아래층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해요, 삼촌. 우리에게 나중은 없어요.”
“왜냐하면 난 이미 죽었거든요.”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일찌감치 위층으로 올라간 윤건우는 아예 듣지도 못했다. 다만 차서아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소파에 앉았는데 저도 몰래 옛 추억이 떠올랐다.
사실 윤건우는 그녀의 삼촌이 아니다. 단지 그녀의 아빠 친구일 따름이다.
차서아는 어려서부터 윤건우를 너무 잘 따랐고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윤건우가 침착하게 호칭을 고쳐주었다.
“오빠 아니고 삼촌.”
그러다가 8살 때 진짜 호칭을 고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해 차서아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녀는 윤건우를 따라 윤씨 가문으로 들어왔으니까.
차서아는 윤건우가 정성껏 키운 장미꽃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남자는 거의 모든 사랑을 차서아에게 퍼붓고 있었다.
처음 윤씨 가문에 왔을 때 앞으로 쭉 얹혀살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매일 밤잠을 설쳤지만 그때마다 윤건우가 한편으로 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상하게 그녀를 재워주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서 거의 약을 달고 살던 차서아는 12살 되던 해에 마침내 윤씨 가문의 하대를 받게 되었다. 다들 윤건우가 언제까지 그녀의 뒷바라지를 해주겠냐며 얼른 다른 데로 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윤건우는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독립을 해서라도 끝까지 그녀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윤씨 가문에서 나온 윤건우는 본인 실력으로 어비스를 설립했고 유진 그룹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시켰다. 그제야 윤씨 가문과의 관계도 마침내 완화되었다.
차서아가 15살 되던 해,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뜻밖의 산사태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가장 아찔한 순간, 윤건우가 위험을 무릅쓰고 깊은 산 속에 들어와 그녀를 구해주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녀만 원한다면 저 하늘의 별이라도 서슴없이 따줄 윤건우였다.
그래도 여태껏 제일 인상 깊었던 일은 바로 부모님이 금방 사망했던 그해, 몸이 유독 허약한 그녀는 고열로 병원에 실려 가서 3일 동안 입원한 후에야 겨우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자마자 차서아는 겁에 질려서 윤건우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흐느꼈다.
“삼촌, 나 곧 죽어요?”
그때 윤건우는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우리 서아는 절대 잘못되는 일 없어. 저승사자가 찾아온다고 해도 내가 꼭 방법을 대서 다시 널 데려올 거야.”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내뱉었고 그 뒤로 정말 10년 동안 차서아를 극진히 보살폈다. 8살부터 18살까지 아무리 힘들어도 그녀를 포기할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강도가 집에 쳐들어와서 그녀를 열몇 번이나 칼로 찔렀고 겁에 질린 차서아는 그에게 수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정작 열이 난 이채린을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전부 꺼버렸다.
이채린은 3개월 전에 그들 삶에 등장했다. 그날 차서아는 윤건우가 깊게 잠든 틈을 타서 몰래 키스했는데 이 남자가 바로 눈을 뜨고 정색하면서 뭐 하는 짓이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이왕 들킨 마당에 그녀도 더는 숨기지 않고 용기 내어 윤건우에게 고백했다.
그때 윤건우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단호하게 차서아를 거절했고 심지어 그녀를 빨리 단념시키려고 정신없이 소개팅을 나가더니 끝내 여러모로 완벽한 조건의 이채린을 데리고 와서 종일 차서아 앞에서 애틋한 모습을 보여줬다.
차서아가 죽을 때 윤건우에게 전화를 엄청 많이 걸었는데 그중 한 번은 이채린이 받았었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고 차서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이채린이 먼저 쏘아붙였다.
“서아 무슨 일이야? 건우 씨 지금 나 먹이려고 죽 끓이느라 전화 받을 시간 없어.”
말을 마친 후 곧장 전화를 꺼버렸다.
전화가 끊긴 그 순간 차서아도 끝내 숨을 거뒀다. 그녀는 이미 죽었지만 집념 때문에 영혼이 좀처럼 이승을 떠나질 못했다.
저승사자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녀를 찾아왔고 그녀도 이번 기회에 저승사자와 거래를 하나 했다.
지금처럼 영혼이 허공을 맴도는 채로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는 대가로 다시 7일 동안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서 후사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차서아는 달력 앞으로 다가갔다. 만약 윤건우가 조금만 꼼꼼했더라면 금방 발견했을 것이다. 이 달력은 오직 7일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달력을 한 장 찢고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삼촌과 작별하는 첫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