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저녁이 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한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본대 차가웠던 남궁진의 얼굴이 이 순간에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변했다.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먼. 원비와 거리를 두라 내 분명 경고했건만, 원비의 고양이를 해친 것도 모자라 어찌 그녀의 유모까지 때릴 수 있단 말이오? 그대는 내가 안중에도 없는가?”
태연히 차를 마시던 조경선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형언할 수 없는 우아함이 느껴졌다.
“전하, 누가 그러던가요? 제가 고양이에게 해코지했다고.”
“지금 발뺌하려 드는 거요? 고양이 발톱에 상처가 났소. 그대 빼고는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사람이 없소.”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듯한 광채를 뿜어내며 조경선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짓자, 이에 불편함을 느낀 남궁진은 화가 치밀어올라 내공으로 공격했다.
그러자 무방비 상태였던 조경선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피를 토하고 말았다.
입가 주변이 새빨갛게 물든 채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궁진을 쏘아보았다.
“사람을 때린 것이 맞으나 고양이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 상궁을 때린 것은 무례함이 도를 넘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원비의 편을 들어주시는 건 알겠습니다만 저 또한 누명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차라리 원비를 제 앞에 데려오시는 것은 어떨는지요?”
“영이가 입은 상처 때문에 원비는 가슴이 찢어지게 오열하고 있는데 무슨 기력이 있어서 그대와 말씨름하겠는가. 그리고 내가 진실 보는 눈을 가졌으니, 그녀를 데려올 필요도 없소. 그건 그렇고 매를 좀 맞아서 반성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기고만장해졌구려.”
그러자 조경선은 탁자를 짚고 일어나며 비아냥거렸다.
“보는 눈이 있으시다고요? 먼 줄 알았습니다. 역시 원비와 의기투합하여 제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시는군요. 어제 일이 누구 잘못인지는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억울하게 매 맞고도 사과 한마디 못 들었습니다. 여화공주만 누명 씌우는 짓거리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원비도 이에 못지않군요. 전하께서 아무 조사도 하지 않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시니 참으로 한심하네요.”
“뭐라!”
눈에 살기가 가득 차 있었던 남궁진이 막 그녀를 혼내주려던 참에 문밖에서 애교 넘치는 선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마마를 용서해 주세요.”
조경선이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원비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비록 이 몸뚱이의 주인이 자신의 가문을 등에 업고 정실부인의 자리를 꿰찼다고는 하나 그만큼 원비에게 많이 당했으니 진 빚은 이미 다 갚은 셈이 아닌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원주가 다가왔다.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하얀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고, 예쁜 눈은 퉁퉁 부어올랐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여인이 애처롭게 울고 있으니, 남궁진이 나선 것이군.’
선원주는 두 손으로 남궁진의 팔을 부여잡았다.
“전하,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마음이 너그러우시니 영이에게 해코지할 분이 아니에요. 하 상궁이 잘못 보았을 겁니다.”
“원비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오.”
남궁진이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날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네.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조경선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마음속으로 남궁진을 비웃더니 코웃음을 쳤다.
“들으셨습니까? 전하. 하인이 잘못 봤다고 원비가 인정했어요. 이래도 제 탓을 하실 겁니까?”
선원주는 당황한 눈빛으로 조경선을 바라보았다.
‘뭐지? 내가 아는 조경선과 달라 보이는데?’
뻔뻔한 조경선의 태도에 남궁진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원비가 이리 말하는 연유를 정녕 모르겠소? 마음이 여려서 왕비가 벌받을까 봐 진실을 감추려고 이러는 거잖소. 왕비는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구먼.”
“전하의 말이 사실이냐? 정말로 날 감싸주려고 그리 말했냐 말이다.”
조경선이 그윽한 눈빛으로 선원주를 응시하자, 선원주는 부담을 느끼고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이상하네. 이년의 위압감이 왜 이리 넘치는 거지?’
“대체 원비에게 무슨 답을 기대하는 것이오?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오? 내가 오랫동안 참아왔으나 계속해서 내 한계를 시험한다면 더 이상 봐주지 않겠소.”
‘한계라. 남궁진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조경선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랫동안 참아왔다고요? 오히려 제가 많이 참아왔습니다. 고양이에게 상처 낸 사람이 제가 맞다면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하오나 제가 아니라 하 상궁이라면 항상 공평하다고 자부하는 전하께서 그 죄를 어찌 물을지 궁금하군요.”
남궁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경선이 서둘러 홍난에게 명했다.
“지금 당장 영이와 하 상궁을 데려오너라. 내가 직접 묻겠다.”
선원주는 덜컥 겁이 났다.
‘왜 자꾸만 이 멍청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느껴질까?’
조경선이 이상해졌다는 하 상궁의 말을 들었을 때는 믿지 않았으나 지금은 조금씩 믿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살을 찌푸린 남궁진을 보고는 다시 안심되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전하는 조경선을 미워하고 나만 총애한다. 그년만 아니었어도 내가 정실부인이 되었을 것인데. 전하는 내게 죄책감을 느끼니 절대 그년의 편을 들지 않을 거야. 조경선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하 상궁이 뒷발에 상처가 난 영이를 안고 왔다.
비록 뒷발을 붕대로 감쌌지만, 피가 스며 나올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영이가 조경선을 보고 비통하게 울어대자, 이를 두려움으로 오해한 남궁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왕비, 영이가 그대를 이리 두려워하는데도 변명할 게 더 남았소?”
“영이야.”
조경선이 부드럽게 부르자, 흰 고양이는 진정을 되찾고 순순히 엎드렸다.
하지만 조경선이 고양이를 안으려고 했을 때 남궁진이 그녀의 손등을 내리치며 잡아먹을 기세로 쏘아보았다.
“어찌 또 만지려 드는 것이오?”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보고 인내심이 완전히 사라진 조경선이 차갑게 말했다.
“상처를 확인해야 제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전하, 참으로 너무 하시네요.”
두 사람이 매서운 눈빛으로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전하, 왕비 마마의 뜻에 따르세요. 사소한 일로 다투시니 소첩의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선원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살기가 조금 누그러든 남궁진이 조경선을 차갑게 쳐다봤다.
“또 무슨 거짓으로 날 현혹할지 내 지켜보리다.”
조경선이 고양이 발의 붕대를 풀자, 핏자국이 드러났다.
‘물로 씻은 후에 그냥 대충 싸맨 것으로 보아 제대로 치료하지도 않았구나. 날 모함하려고 고양이에게 해를 가하다니. 너희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과거의 조경선이라면 어떻게 대응할지 몰랐겠지만, 감히 잔꾀를 부려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나를 모함하겠다고?’
영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울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조경선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하 상궁을 떠보았다.
“하 상궁, 영이는 평소 사람을 할퀴는 버릇이 있느냐?”
조경선의 질문에 선원주가 먼저 답했다.
“영이는 아주 순해서 절대 사람을 할퀴지 않아요. 이리 의심을 하는 것으로 보니 마마께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역시 선원주는 세 치 혀를 잘 놀려대는군.’
조경선은 선원주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원비에게 물은 것이 아니다.”
선원주는 입을 꾹 다문 채 억울한 눈빛으로 남궁진을 바라보았다.
남궁진이 막 입을 열어 조경선을 꾸짖으려는 순간 조경선이 다시 물었다.
“만약 누군가가 학대해 아프게 해도 영이는 사람을 할퀴지 않는단 말인가?”
하 상궁이 조경선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영… 영이가 사람 할퀴는 것을 쇤네는 본 적이 없사옵니다.”
그러자 남궁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왕비는 영이가 사람을 할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난 그리 생각하지 않소. 영이는 순하니 그대가 먼저 영이에게 해코지하지 않는 이상 영이가 먼저 할퀴는 일은 없을 것이오.”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조경선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남궁진은 살짝 당황했다.
조경선의 시선에 소름이 돋은 하 상궁도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