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이 시각, 낙향각은 한층 더 뒤숭숭하였다.
선원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국을 들이켰으나 도무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사기 그릇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를 본 명희가 황급히 뛰어들어와 수습하며 외쳤다.
“마마, 노여움을 푸소서!”
“노여움을 푸라고? 대체 어떻게 그러라는 것이냐! 전하께서 석조각으로 가서 식사를 하셨다는데, 그 여인이 도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남궁진은 언제나 선원주와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선원주는 위기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여인,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더욱이 이제 와서는 마치 남궁진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분명 일부러 저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예전처럼 남궁진을 졸졸 쫓아다니던 모습보다 더욱 역겹기 짝이 없었다.
선원주는 명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 주인이 무슨 말을 전해 왔느냐?”
명희는 선원주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전했다.
“왕비께서 요즘 연향의 집을 드나들며 그 아이의 부친을 치료하고 계시답니다. 그리고 이미 노인의 병세가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선원주는 크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여인이 의술을 안다고? 잘못된 정보가 아니냐?”
“주인께서 확실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저는 걱정되는 것이, 예전에 연향을 매수했던 일이 만약 왕비에게 들켜 전하께 전해진다면 마마께 불리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선원주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만일 보통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전하는 코웃음 치며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깊었으니까.
그러나 조경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는 능란한 언변을 지닌 자였다. 지금의 조경선은 예전과는 달랐다. 혹여 무슨 궤변을 늘어놓아 남궁진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는 않을까?
그래서였군. 그래서 남궁진이 저녁식사 자리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분명 그 여자가 무슨 꿍꿍이를 꾸민 것이다!
명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주인께서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하셨습니다. 왕비를 손볼 사람이 따로 있으니 그저 지켜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손볼 작정이지?”
명희는 조심스레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러자 선원주는 비로소 만족스럽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의 미간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어쩌지? 그 여인은 입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알 수 없는 의술까지 익혔단 말이다.”
“염려 마십시오. 주인께서는 후속 대책까지 마련해 두셨습니다. 어차피 마마께서는 전하께서 왕비를 더욱 미워하길 바라지 않으셨습니까? 주인께서 그러셨습니다. 왕비가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 방도가 있다고요. 전하께서 더더욱 경멸하시도록 말입니다.”
선원주의 눈이 번뜩였다.
“그게 무슨 방법이냐?”
“만약 왕비가 주인님의 혼례일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왕비는 그날 이후 영영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 사람의 혼례일...
...
그날 밤.
조경선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홍난이 급히 뛰어들며 외쳤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조경선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평소 침착한 홍난이 이토록 다급한 모습이라니,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허둥대는 것인가?
그녀는 곧바로 겉옷을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연도 이미 깨어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창백했다.
“마마, 방금 연향이 관아로 달려가 신고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것도 마마께서 치료하다가 죽으셨다고 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조경선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술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분명 오늘 아침 침을 놓은 후, 노인의 안색이 한결 좋아졌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손을 쓴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연향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
진왕부 앞뜰.
남궁진은 이미 먼저 소란을 듣고 나와 있었다.
조경선이 도착했을 때 그는 검은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머리를 묶은 채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유난히 냉엄해 보였다.
연향은 관아 앞에서 북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급기야 지부까지 나서 관군을 이끌고 진왕부를 에워쌌으니, 지금의 왕부는 한 마리의 파리조차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삼엄하였다.
근래 들어 귀족이 백성을 함부로 짓밟는 사례가 자주 보고되었고 황제도 조정에서 크게 노하며 황자라 할지라도 살인 사건에 연루된다면 엄정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어명을 내린 바 있다.
이제 조경선이 인명을 해쳤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니, 감히 이를 덮어둘 수 없는 것이었다.
연향은 몸을 떨며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소인의 부친께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계셨으나 왕비마마께서 꼭 침을 놓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소인은 왕비마마의 의술을 믿고 따랐건만 오늘 마마께서 떠나시자마자 부친께선 입에 거품을 물고 얼굴이 새파래지셨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숨을 거두셨사옵니다.”
“허튼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조경선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마음 한구석에 의구심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기색을 유지했다.
연향은 직접 치료의 효과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모든 책임을 왕비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이 일, 분명 수상하다!
그때 지부가 앞으로 나섰다.
“소인은 경도부윤 송현이라 합니다. 왕비마마께 여쭐 것이 있으니 부디 숨김없이 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경선은 차갑게 바닥에 엎드린 연향을 훑어보았다.
“물어보시오.”
“연향 낭자가 말하길, 낭자의 부친은 본디 중풍을 앓고 있었고 원래 도사를 불러 부적을 쓰려 하였으나 마마께서 이를 막고 직접 치료를 하셨다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렇소.”
지부는 다시 물었다.
“왕비마마께서 환자에게 약을 지어 주시고 수차례 침술을 시행하셨다는데, 이것도 사실입니까?”
“그렇소.”
“검시관이 시신을 조사한 결과, 몇몇 일반적인 혈자리 외에도 구미혈에 선명한 침자국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인체의 급소로, 가벼우면 간담을 손상시키고 심하면 심맥이 막혀 즉사할 수도 있지요. 혹, 마마께서 놓으신 것입니까?”
조경선은 콧방귀를 뀌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침을 놓은 부위는 모두 팔과 다리였소. 구미혈은 배꼽에서 위로 일곱 치 되는 곳인데 난 한 번도 그곳을 건드린 적이 없소. 내 옆을 지킨 시녀 초연이 이를 증언할 것이오.”
“게다가 연향 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연향은 곧장 반박했다.
“마마께서 부친께 침을 놓을 때 윗옷을 모두 벗기고 시술하셨습니다. 침을 놓은 곳이 손발뿐이라니, 어찌 감히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방금 나리께서 말씀하신 구미혈이 어디인지는 모르나, 그 설명대로라면 왕비마마께서 충분히 찌르셨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주변 사람들은 의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조경선이 한 늙은 남자의 옷을 벗기고 침을 놓았다는 말에 모두가 경멸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진왕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색골이라는 소문이 온 경도에 퍼진 마당에, 이제는 노인까지 건드렸단 말인가? 저런 파렴치한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조경선은 싸늘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배은망덕한 것, 내가 선의로 도와주었건만 감히 이리도 모함을 하다니! 말해라, 누가 시킨 것이냐!”
연향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이 일이 조씨 가문의 소행일 리는 없다. 사람이 죽은 사건이 불거지면 조씨 가문이 오히려 치욕을 당할 터. 그렇다면 남궁진이 자신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는 것인가? 진왕부의 명예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것인가?
조경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궁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남궁진이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왜 날 그렇게 보는 것이오?”
“혹시 전하께서 저를 내치기 위해 일부러 꾸민 계략은 아니십니까?”
남궁진은 냉소를 지었다.
“내가 이런 비열한 수를 쓸 리 없소! 감히 날 의심하는 것이오?”
조경선은 느슨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그동안 얼마나 애첩을 감싸며 저를 몰아붙이셨지요.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남궁진은 분통이 터졌다.
“뭐라!”
그러나 조경선은 그의 반응을 보며 판단했다. 이 일의 배후는 남궁진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선원주, 설마 너란 말이냐?’
감히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