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조경선은 처음에는 단순한 추측이었으나 정임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내가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으냐? 아버지가 너를 보냈으니 당장 내치지는 않겠지만 다음번에도 이런 짓을 한다면...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할 줄 알아라.”
정임은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보았고 이를 본 조경선이 다가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네 혈을 막아 두었으니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잘 반성하도록 하여라. 약간의 고통 없이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서재에서 남궁진은 무심한 표정으로 바둑돌을 하나 집어 강헌의 돌을 압박하며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왕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강헌은 조경선에게 ‘사부’라 불렸던 인연을 떠올리며 아직 제대로 가르칠 기회조차 없었던 이 ‘제자’를 두둔하고 싶었다.
“소인이 보기에는 마마의 행보가 꼭 조씨 가문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임은 조 낭자가 데려온 아이로 분명 여정 옹주의 심복일 터. 곧 오왕비가 될 터이니, 조두훈이 이미 오전하에게 줄을 댄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네 말은 왕비를 의심하지 말라는 뜻인가?”
강헌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소인이 보기에 마마는 악독한 여인이 아닙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병자를 돌보며 덕분에 그 자가 병세를 크게 호전시켰지요. 마마께서 보여준 것은 정교한 의술뿐만 아니라 인술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손이 쉽게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요.”
남궁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 여인이 날 협박하여 혼인을 강요했던 그 날이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 여인을 어찌 곁에 둘 수 있겠느냐.”
“송구하오나 소인이 감히 말씀드리자면 마마가 아니더라도 원비 마마의 가문 역시 정실이 되기에는 부족한 배경이었습니다. 왕비 자리는 조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다른 이가 차지했을 것이지요. 전하께서 마마 한 사람에게만 노여움을 품으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마마가 전하를 너무도 사랑했을 뿐 아닙니까.”
“강헌!”
남궁진의 음성이 날카롭게 낮아졌다.
“네가 도를 넘었구나.”
강헌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자책했다. 전하 앞에서 원비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남궁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경선이 변한 것을 눈치채고 있던 그는 더욱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안 되겠다. 반드시 확인해야 해.’
동원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전하, 식사하실 시각이 되었습니다. 원비 마마 처소로 가시겠습니까?”
남궁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석조각으로 간다.”
석조각이라는 세 글자가 나오자 동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전하께서 왕비 처소로 가신다고?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밤이 깊어갈수록 정임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자니 뚱뚱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사나운 형상이 되었다.
남궁진이 처소에 들어서자 그의 예민한 청각은 정임이 낮게 욕설을 내뱉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 더러운 년이야!”
그의 미간이 깊게 주름졌는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쾌감이 들었다.
정임은 그를 보자마자 급히 태도를 바꾸며 억울한 얼굴로 인사했다.
“전하.”
남궁진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넌 왕비의 시녀가 아니더냐? 어째서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냐?”
“저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아마도 마마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셔서 저에게 화를 푸시는 듯합니다.”
‘흥, 조경선이 전하 앞에서 감히 진실을 말할 리가 없지.’
“왕비가 이유 없이 하인을 괴롭히는 못된 여인이라는 것이냐?”
“제가 어찌 감히 마마를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정임은 급히 말 했으나 얼굴 표정은 이미 충분히 말해주고 있었다.
남궁진은 싸늘히 웃으며 동원에게 눈짓했다.
“주인에게 불경한 죄, 벌하거라.”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정임의 비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경선이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방 안에서는 초연이 어린 시절의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조경선은 흥미로워하며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드물게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흔들리는 촛불 아래, 조경선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눈동자는 값진 보석처럼 빛났고 그 괘씸한 얼굴조차 순간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남궁진을 본 순간 사라졌다.
그녀는 마치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경계하며 차갑고 날 선 태도로 변했다.
“전하께서 석조각까지 찾아오시다니, 참으로 뜻밖입니다.”
그 말투는 분명 그를 문밖으로 내몰고 싶다는 뜻이었다.
‘변함없이 얄미운 얼굴이군.’
남궁진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 왕부에서 내가 가서는 안 될 곳이라도 있단 말이오? 오늘은 여기서 식사를 하려고 하오. 미리 알려야 하오?”
조경선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물론이지요. 평소 저 혼자 먹을 양만 준비하는데 전하까지 오시면 두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매일 준비해 둘 수도 없는 일이니 미리 알려주셔야지요.”
남궁진은 냉소했다.
“왕비는 내가 오는 것이 불편한가 보오.”
그녀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부정조차 하지 않았다.
‘이 여인이 감히!’
그는 앉으며 은근히 그녀를 살폈다. 예전 같으면 그가 한 걸음만 다가가도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을 터. 그런데 이제는? 그의 식사 동참 선언에도 기쁨은커녕 짜증만 내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남궁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왕비, 그대가 변한 것은 여화 공주가 떠난 날부터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소?”
조경선의 동작이 잠깐 멈추더니 금방 평소대로 돌아왔다.
“별일 아니에요. 다만 형세를 제대로 파악했을 뿐이죠. 자기 집에서도 거의 죽을 뻔했는데, 예전처럼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면 언젠가 목숨을 잃을 게 뻔하잖아요. 차라리 좀 더 영리해지는 게 낫더라고요.”
남궁진이 냉소를 지었다.
“난 사람이 이렇게 영리함과 어리석음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처음 듣소.”
조경선이 웃음을 살짝 머금었다.
“전 늘 영리했답니다. 특별히 칭찬해 주실 필요 없어요.”
남궁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멋대로 해석하지 마시오. 난 경고하는 거요. 계략을 부리지 말고 조용히 처신하면 조금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거요.”
“그 말은 저에게 하는 게 아니라 전하의 여인에게 하는 게 맞을 듯하네요”
조경선이 비웃듯 말했다.
“이 말을 저에게 할 것이 아니라 전하의 연인에게 경고하는 것이 맞지 않겠어요? 그 여인더러 얌전히 처신하라고 말이에요. 괜히 저를 건드렸다간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어요.”
탁!
남궁진이 낯색이 안 좋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건방지군!”
조경선이 입가를 가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게 다가 아니에요. 만약 또 누군가 눈치 없이 저를 건드린다면 더 건방진 걸 보여줄 수도 있답니다.”
남궁진이 그녀를 차갑게 응시했다.
“정말 내가 그대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오?”
조경선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머, 무서워라. 정말 방법이 있다면 한번 시험해보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 적국의 황후로서 온갖 풍파를 겪어온 그녀가 이 정도 협박에 겁먹을 리 있겠는가? 어림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