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나는 엄준호를 이용해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약혼녀를 보는 순간 이 기회를 활용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심은영이 나에게 화풀이하게 만든 것도 어쩌면 나만의 사과였을지도 모른다. 역광이라 강도현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눈빛에 슬픔과 분노가 섞여 있는 걸 느꼈다. 내가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술에 취한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더 늦게 왔더라면 네 위장에 구멍이 날 뻔했어. 네 몸을 그렇게 함부로 굴지 마.” 마치 꼰대처럼 말하는 그 말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어렸을 때 아빠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항상 하셨다. 그러나 아빠를 잃고 나서야 그때의 말을 후회했다. “정말 우리 아빠랑 똑같아요.” 그는 잠깐 멈칫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손을 내밀어 강도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래도 다행히 오빠가 왔잖아요. 매번 구해줘서 고마워요.” 피곤했는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잠이 들었다. 마치 꿈과 현실이 뒤섞인 듯한 느낌 속에서 누군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는 심한 두통과 더불어 위가 쓰려왔다. 여기는 호텔인가? 방 안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다행히도 어제 술에 많이 취했지만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다 보니 기억이 끊기지는 않았다. 테니스클럽에서 호현주가 엄준호의 비서가 나를 찾아왔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이미 함정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술집에 도착하자마자 엄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 도착했어요.] 이렇게 여섯 글자만 보냈다. 엄준호는 문자를 보자마자 바로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나는 심은영의 친구들을 통해 그가 공항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준호의 집안은 강씨 가문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해성시에서 명성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강도현이 무조건 찾아올 거라고 믿었고 심은영 역시 나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