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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고서준 말고도 기정그룹의 창시자이자, 고서준의 할아버지인 고명준이 있었다. 이번 연회는 우리 집안에서 개최한 것이다. 평소에는 유명무실한 회사 관계자만 참석했다. 그런데 왜 은산의 실세 고명준이 이곳에 있단 말인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들을 바라봤다. 고명준도 고서준도 아니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멸이 섞인 표정, 내가 너무 잘 아는 것이었다. 김정태는 또다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정태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이미영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나를 끌어당겼다. 전생, 나는 고명준을 세 번 정도 만난 적 있다. 번마다 비웃음을 당하며 시작해서 비웃음을 당하며 끝났다. 이지현은 고명준 전우의 손녀였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그러나 내가 끼어든 탓에 이지현이 출국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고명준에게 미움받게 된 것이다. 고명준의 말년에 내가 병수발을 계속 들어줬는데도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생은 고서준도, 고명준에게도 아부하지 않을 것이다. “회장님, 이쪽은 제 딸 김수아예요.” 김정태는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지난달 15일에 서준이 차에 탄 적 있어요. 그날 하룻밤 꼬박 안 돌아오더니, 이튿날 서준이 옷을 입고 돌아왔더라고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고서준이랑 외박했다고? 말도 안 돼!’ 나는 기껏해야 같은 반 친구라는 명분으로 아부할 줄 알았다. 그가 돈 좀 벌겠다고 없는 말까지 지어낼 줄은 몰랐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아버지가 있단 말인가? 분노와 실망에 나의 눈시울은 빠르게 붉어졌다. 무의식적으로 고서준과 눈이 마주치자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이 뜨거웠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한다고 해도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태의 목적이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고명준이 나보다 먼저 입을 열어서 고서준에게 물었다. “서준아, 이 말이 사실이니?” 고서준은 나를 힐끗 보더니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실 거예요. 차라리 당사자에게 직접 물으시죠.” 환생했다고 해도 사랑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이성이 고서준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수아야, 네가 말해 봐!” 나의 침묵에 김정태는 다급하게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겉으로 웃고 있기는 했지만 선명한 위협이 보였다. “너 서준이 좋아하잖아. 회장님한테 말씀하면 뭐든 들어주실 거야. 그러니 얼른 말해 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김정태의 무식함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는 기정그룹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했다. 일어난 적도 없는 일로 목적을 달성할 줄 알았다니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기정그룹과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망해가는 우리 집안이 최초의 성공자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나는 김정태의 손을 밀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고명준과 고서준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달 15일은 폭우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서준이는 제가 택시를 잡지 못하는 걸 보고 친구 집까지 데려다줬어요. 그날 저는 친구 정서현이랑 같이 있었어요.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바로 연락할게요.” 내 말을 들은 순간 사람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고명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도움을 받고 괜한 오해를 만들었네요. 불편하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몸을 일으켜 고서준을 바라봤다. 몇백 년이 지나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전에는 내가 너무 귀찮게 굴었지? 나 때문에 오해받게 해서 미안해. 너 사람 좋고 공부 잘하는 거 진심으로 존경해. 항상 따라 배우고 싶었어. 그뿐이야.” ‘고서준, 난 널 포기했어. 진심으로.’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의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그러나 고서준은 듣자마자 피식 웃기만 했다. 그가 왜 웃는지 이해가 안 됐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은 아주 어두웠다. 반대로 고명준은 나의 대답이 아주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심지어 호탕하게 웃으며 칭찬까지 해줬다. 그들이 떠난 다음 김정태는 정색한 얼굴로 나를 끌고 정원의 구석으로 갔다. “김수아, 감히 내 말에 토를 달아?” 그는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발을 들어 차려고 했다. “죽고 싶지?!” 나도 가만히 당하는 것이 아닌 반항하려고 했다. 이때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저 지금 잘못 본 거 아니죠? 김 대표님, 혹시 지금 친딸을 폭행하려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눈웃음을 지은 눈이 보였다. 나민준, 그는 이지현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이자 고서준의 숙적이었다. 만약 이지현이 나의 인생에 드리워진 그늘이라고 하면, 나민준은 숨겨진 악마였다. 겉으로만 웃는 얼굴이었지, 뒤에서는 얍삽한 짓을 아주 많이 했다. 그게 바로 내가 죽을 때까지 친구를 못 사귄 이유다. 그러나 지난 생에서 우리는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 나민준...” 김정태는 위선의 가면을 벗은 다음 누군가 나타날 줄 모르는 듯 어색하게 삐걱댔다. 먼저 정신을 차린 이미영은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켰다. “오해했어요. 수아가 버릇없이 말대답해서 잠깐 다퉜을 뿐이에요. 우리 남편도 잘못했죠. 화를 못 이겼으니 말이에요.” 이미영은 나를 부축하며 잔뜩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수아야, 네 아버지가 한 말은 마음에 두지 마. 어디 다치지 않았어? 이모랑 같이 병원에 가자.” 나는 이미영의 손을 뿌리치고 치마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미영은 나를 쫓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김정태가 가슴을 움켜잡고 숨이 안 쉬어지는 척 연기를 해댔다. 이 모든 상황이 나는 웃기기만 했다. 전생에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가족의 정으로 나를 묶어두려고 했다. 그리고 나를 이용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전생에는 순순히 당했지만 이번 생은 다르다. 호텔에서 나온 나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핸드폰도 지갑도 휴게실에 있었다. 6월초의 바람은 사정없이 맨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나는 길거리에서 배회했다. 몰래 돌아가서 물건을 챙겨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나는 결국 지나가던 사람의 핸드폰을 빌려서 정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쯧. 하도 당당하게 굴길래, 난 또 대책이 있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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