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누군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서준아, 김수아 진짜 너무해. 자꾸 지현이를 괴롭혀.”
이지현은 붉어진 눈시울로 서럽게 말했다.
“난 괜찮아, 서준아. 수아가 나한테 오해가 있나 봐.”
고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공기는 빠르게 굳어갔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왜, 이제 이지현 편을 들어주게?’
그는 시선을 돌려서 성적표를 바라봤다. 잠시 확인하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국어 성적이 저게 뭐야?”
그의 말투는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나는 순간 이런 식으로 비꼬려는 것인 줄 알았다.
나는 냉소를 지으며 반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서준이 먼저 풀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잘 봤네. 계속 노력해.”
“?”
그의 말투는 오늘의 날씨를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그러나 나는 넋을 잃은 채 귀신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고서준이 드디어... 미친 건가?’
내 넋이 나간 눈빛을 보고 고서준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정신 차려. 쓸데없는 곳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문제라도 좀 더 풀고.”
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다른 사람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해졌다. 이게 김수아를 혼내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보다도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지현의 반응을 보니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그녀는 아직 젊었다. 괜찮은 척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정서현을 데리고 떠났다. 교실에 돌아가 보니 고서준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나는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문제집을 펼쳐봤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전생 담임 선생님한테 받았던 거잖아?’
나는 속으로 묵묵히 감탄했다. 이 문제집은 나의 약점을 특별히 정리해서 만든 듯했다.
‘그게 왜 고서준이 준 선물에 껴 있지?’
“수아야, 고서준이 아까 널 칭찬한 거 맞지?”
정서현이 다가와서 내 생각을 끊었다. 약간 상기된 말투로 말이다.
“...”
자리에 있던 서이준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서준이 오늘 해외 대회에 참가하러 출국해야 할 텐데? 공항에 있어야 하는 애가 학교에 왔었어?”
“가는 길에 성적 보러 온 게 아닐까?”
“하나는 남쪽이고, 하나는 북쪽이야. 그게 어떻게 가는 길이 되는데? 그리고 서준이는 모의고사 안 봤어. 성적 확인할 필요 없어.”
서이준이 안경을 치킥 올리며 말했다.
문제집을 바라보며 나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의 나는 조금이라도 진보하면 고서준을 찾아가서 자랑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칭찬한 적 없었고 가차 없는 말로 자신감을 떨어뜨리기만 했다.
그러나 조금 전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히 칭찬을 했다.
침묵 속에서 이지현 일행이 들어오며 시끄럽게 굴었다.
“지현아, 서준이는 분명 네 성적을 확인하러 등교했을 거야! 정말 스윗하다!”
기분이 좋아진 이지현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럴 줄은 몰랐어.”
이제 답은 나왔다. 나는 잠깐이라도 말이 안 되는 생각을 한 자신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공부나 하자.”
나는 고개를 숙여서 문제 풀이에 집중했다. 고서준이 무엇을 하든 나와 상관없었다. 그의 행동에 하루의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날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문제 풀이에 집중하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세 번째 모의고사에서 나는 전교 10등의 성적을 달성했다.
세 번째 모의고사 성적을 발표하는 날에도 고서준은 성적표만 확인하고 부랴부랴 떠났다. 그다음에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이지현에게 아주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만 서이준에게서 그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서준이 대회에서 우승했대. 지금 해외에 노벨상까지 받은 교수님 랩실에 초대돼서 공부하고 있어. 대박 기회 아니냐?”
“고서준 입국 했어. 요즘 아버지 도와 회사 관리하느라 엄청 바쁘대.”
“서준이 또 출국했어. 이번에는 국제 회의래. 회사를 대표해서 가는 거라고 했어.”
“...”
서이준은 어디에서 들었는지 고서준의 소식에 바삭했다. 그리고 번마다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있었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자리를 바꾸고도 남았을 것이다.
‘근데 전생에도 고서준은 이렇게 바빴었나? 고3 때 계속 학교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공부 가르쳐 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을 리도 없지.’
수능시험 일주일 전, 김정태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나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문제 풀이로 바빴던 나는 짜증 내면서 말했다.
“안 가요.”
김정태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너 아직 내 돈 쓰면서 내 집에 사는 거 잊지 마라.”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당장 나가 살라고 해도 나는 두려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협박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김정태는 또 수그러든 말투로 달랬다.
“수아야, 이번 한 번만 도와줘. 너 밀키웨이에 옷 좋아했지? 아빠가 신상으로 선물해 줄게.”
나는 펜을 내려놓으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계절 입을 것 각각 5벌씩 주세요.”
밀키웨이의 가격대는 아주 높았다. 5벌이라면 최소 몇천만 원은 필요했다.
물론 나는 김정태의 소비 능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큰돈은 맞지만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역시나 이를 악물고 허락했다.
“알았어.”
이튿날 저녁, 나는 김정태를 따라 호텔 연회장에 갔다. 김정태는 사람들을 만나기에 바빴고, 나는 디저트를 맛보기에 바빴다.
“안녕하세요. 나랑 술 한잔할까요?”
샴페인 한 잔이 내 앞에 나타났다. 눈웃음을 지은 상대는 딱 봐도 카사노바였다. 익숙한 얼굴이지만 누구인지 생각나지는 않았다.
나는 술을 거절하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미성년자라서요.”
그는 잠깐 흠칫하다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샴페인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예의껏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요.”
성의 없는 핑계에 상대는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처럼 속이 다 보이는 미소가 아니라 훨씬 보기 좋았다.
그는 흥미진진하게 나를 바라봤다.
“저는 나민준이라고 해요.”
‘나민준?’
나는 이제야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나민준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수아야, 와서 네 친구 서준이한테 인사해야지!”
이때 김정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린 나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