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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By: Webfic

제17장

다음 날, 김소연은 집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엘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를 태우러 온 고급 차량과 몇 명의 비서들이 뒤따랐다. 엘의 생활은 규칙적이면서도 까다로웠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가사 도우미에게 말을 남겼고 이옥순은 그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아가씨, 도련님께서 출장 가셨어요. 가기 전에 당부를 남기셨어요. 도련님이 안 계시는 동안 아이를 대충대충 대하지 마시라고요. 그리고 어제 비를 맞으셨으니 오늘은 푹 쉬시고 아무 일 없으면 외출은 삼가시길 바라요.” “...” 김소연은 말문이 막혔다. 대체 언제 그녀가 아이를 함부로 대했다는 말인가. 엘은 정말 뒤끝 있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어젯밤의 민망했던 순간을 떠올리니 그가 출장을 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김소연은 점심에 강여진과 함께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방에 틀어박혀 자료를 찾아보고 스케치를 연습하며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 준비를 했다. 해가 저물 무렵까지 바쁘게 작업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김소연은 온 신경을 디자인 작업에 쏟고 있었기에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바로 받았다. “김소연 씨 맞으세요? 김 회장님께서 술집에서 사업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술에 취해 넘어지셨어요. 혹시 와서 모셔가실 수 있을까요?” 김소연은 스케치하던 손을 멈추고 차갑게 대답했다. “노수영 씨나 김은지 씨에게 전화하세요. 그분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이니까요.” “두 분 모두 전화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김 회장님께서 직접 김소연 씨 연락처를 주시면서 김소연 씨도 그분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고혈압으로 상태가 위중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종업원의 난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소연의 얼어붙은 마음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김기태가 아무리 인간 같지 않다고 해도 결국 그녀의 아버지였다. 아무리 미워도 그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김소연은 냉랭하게 말했다. “주소를 알려주세요.” 간단히 정리한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이옥순과 집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홀로 집을 나섰다. 프로스트 바. 김소연은 차에서 내려 바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에서 종업원을 찾았다. “김기태 씨는 몇 번 룸에 있어요? 상태는 괜찮나요?” “8번 룸에 계십니다. 상태가 심각하니 빨리 와보세요.” 김소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종업원을 따라 좁은 복도를 걸어갔다. 룸 번호를 세던 그녀는 7번 룸이 복도 끝에 있는 걸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 8번 룸에 도착하지 않았나요?” “앞에서 한 번 더 꺾어야 해요.” 어두운 조명 아래 종업원이 김소연을 흘긋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김기태가 다쳤다면서 굳이 이렇게 외진 곳에 데려왔다는 게 너무 의심스러웠다. 김소연은 바짝 긴장하며 본능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밖으로 데리고 나오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종업원이 갑자기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강하게 밀어붙이며 복도를 돌아 곧바로 문 안으로 그녀를 집어넣었다.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김소연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방 안을 살피던 그녀는 충격과 놀라움에 숨이 멎을 듯했다. 김기태는 편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또렷했고 사지가 멀쩡했다. 취해서 쓰러졌다는 건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그 옆에는 노수영이 입가에 냉소를 띠고 서 있었다. 그 순간 김소연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혈연의 정은 마치 주먹이 되어 그녀를 강타했고 숨 막히는 고통이 온몸을 짓눌렀다. ‘함정이었어...’ 김소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날 여기로 끌어들여 놓고 대체 뭘 하려는 거죠, 김기태 씨?” “건방진 년! 부모에 대한 효심 따윈 눈곱만큼도 없구나.” 김기태는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제 네가 일부러 은지를 망신 줘서 우리 김씨 가문이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게 한 거야? 지금 은지 영상이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거 알아?” 김소연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제 잘못이라고요? 은지가 유산했다고 거짓말하며 저를 모함하려 한 건데, 그걸 제가 가만히 당했어야 효심 있는 딸이 되는 거예요? 김기태 씨, 당신은 아버지 자격도 없어요. 당신 딸이나 잘 교육하세요. 맨날 유산이나 하니까 웃음거리가 되는 거죠.” 김기태는 혈압이 오른 듯 관자놀이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 입 다물어! 네가 지금 뭘 잘했다고 아비한테 대들어. 너야말로 어디 가서 더러운 씨를 임신했잖아! 김씨 가문에서 네가 가장 큰 웃음거리야.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는지 알긴 해? 당장 병원에 가서 지워버려!” 노수영이 나서서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거들었다. “소연아, 어제 네가 너무 심했어. 네 아빠도 은지를 위해 공정하게 처리하려는 거야. 은지가 기분이 나빠서 허씨 가문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네 아빠가 얼마나 곤란해지겠니? 은지의 배는 귀해. 네 배 속의 애는 창피하고 아무 가치도 없잖아.” 그 말에 김기태는 더욱 분노했고 눈빛은 음산하게 변했다. “당장 얘를 병원에 끌고 가!” 김소연은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마음이 이미 꽁꽁 얼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서서히 그녀를 잠식해갔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겨우 김은지의 화를 풀어주겠다고 날 속여 여기로 데려와서, 내 아이를 죽이겠다고? 당신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녀는 몸을 돌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노수영이 손짓하자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단숨에 그녀를 제압하며 움직일 틈조차 주지 않았다. 김기태는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끌고 가!” “난 안 갈 거예요! 아빠, 나도 아빠의 딸이에요.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죠?” 김소연은 거칠게 몸부림치며 울먹였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고 그 마지막 한 조각의 부성애를 깨우고 싶어 몸부림쳤다. 김기태의 얼굴이 굳어지며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자 노수영이 나서며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오늘 제대로 손 보지 않으면 앞으로 애가 점점 더 막 나갈 거예요. 디자인 공모전에서 은지를 이기기라도 하면 한울 그룹은 끝장이에요! 병원에 가기 싫다니까 여기서 그냥 끝내면 되잖아요. 아이를 유산하게 하려면 발로 몇 번 차면 충분해요.” 이해관계를 따져보면 김소연이 위협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김기태는 경호원들을 힐끗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당신 말대로 해. 무서운 게 뭔지 제대로 가르쳐줘.” 그러고는 냉정히 룸을 나섰다. 노수영이 눈짓을 보내자 경호원이 얼른 가서 문을 잠갔다. 그러자 노수영은 잔인하게 김소연의 얼굴을 발로 짓밟으며 외쳤다. “죽도록 패버려! 유산만 시키는 게 아니라 자궁도 망가뜨려야 해!” “김소연, 네 아빠가 무서운 게 뭔지 알려주라잖아!” 김소연은 고통에 눈을 부릅뜨며 붉게 물든 눈동자에서 차가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했고 마음 약해 속은 자신이 미웠다. 손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그곳에는 엘의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그들 사이의 협의 결혼의 기반이었고 한 생명이었다. 절대 이 아이를 잃을 수 없었다. “아아아!” 노수영이 발길질을 멈추자 건장한 남자가 김소연을 가차 없이 바닥으로 내던졌다. 김소연은 바닥을 구르며 몇 미터를 굴러가다 테이블 모서리에 등을 부딪쳤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등을 찌르며 극심한 통증을 일으켰지만 김소연은 이를 악물고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그들의 험악한 손길을 피하려 했다. “계속 도망쳐 봐. 이 년아.” “더는 꼼짝하지 못하게 옷을 찢어버려!” 네 다섯명의 건장한 남자들은 테이블을 걷어차서 넘어뜨리고 김소연의 머리채를 잡아 복도로 끌어냈다. 그리고 옷깃을 찟어 그녀가 저항하지 못하게 몸을 내리 눌렀다. 주변엔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희미한 불빛 속 남자들의 움직임은 더 거칠어졌다. “자, 이제 슛 들어갑니다.” 한 남자가 잔인하게 웃으며 걷어차려고 했다. “아, 안돼...” 김소연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리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선은 그녀의 배를 힘껏 걷어차려는 건장한 남자의 뾰족한 구두에 고정되었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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