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그가 이런 취미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김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엘, 가요. 짖는 개는 무시하는 게 답이에요.”
그러자 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를 놀라게 했으면 울게 만들어야지.”
노예슬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얇은 입술이 유려하게 올라가며 내뱉는 말이 섹시하기 그지없었다.
“멍하니 뭐해? 빨리 음식 주문해.”
“그래. 네가 원하는 만큼 주문해!”
노예슬이 당당히 블랙 카드를 던지며 허세를 부리자 엘은 우아하게 지배인을 불렀다. 지배인은 엘을 보자마자 식은땀을 흘리며 공손히 물었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여기 있는 모든 메뉴판을 가져오세요.”
엘이 무심하게 말했다.
노예슬은 순간 당황했지만 모든 메뉴라고 해도 한두 권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배인이 가져온 것은 스무 권이 넘는 메뉴판이었다. 한 권당 스무 가지 요리가 적혀 있었다.
엘은 차갑게 말했다.
“여기 있는 거 전부 주문해 주세요.”
“이 양아치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노예슬이 질겁하며 묻자 엘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나한테 밥을 대접하고 싶다며?”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전히 단톡방에서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노예슬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래! 어치피 정우가 은지한테 준 블랙 카드 한도가 어마어마하다고!”
결국 400여 가지 요리가 전부 테이블에 올라왔고 가격은 6억을 넘겼다.
노예슬은 놀라서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엘은 입꼬리를 비틀며 여유롭게 말했다.
“먼저 가서 결제해. 그럼 내가 너 따라갈 테니까.”
그와 자고 싶었던 노예슬은 손에 넣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결제하러 갔다.
하지만 프런트에서 블랙 카드가 결제되지 않았다.
지배인이 차갑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 카드는 이미 정지되었습니다. 현재 로즈가든 회원 자격조차 충족하지 못합니다. 현금으로 결제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전취식으로 경찰서에 신고하겠습니다.”
카드가 정지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노예슬은 얼이 빠져 지배인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어요! 다시 확인해 봐요. 이건 허씨 가문 도련님이 준 블랙 카드라고요!”
지배인은 냉소를 흘렸다.
‘허씨 가문 둘째 아들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결국 보안 요원이 노예슬을 붙잡아 김소연의 테이블 앞으로 끌고 갔다.
지배인은 노예슬에게 단호히 말했다.
“제 손님을 모욕했으니, 무릎 꿇고 사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서로 끌고 가겠습니다.”
노예슬은 김소연과 엘을 번갈아 보며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이 양아치 같은 남자와 김소연이 지배인의 고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배인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냉정하게 재촉했다.
“무릎 꿇으시죠?”
결국 노예슬은 어쩔 수 없이 수치심을 삼키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남자가 느릿하게 눈을 들어 올리며 무심한 얼굴로 김소연을 향해 말했다.
“휴대폰 줘.”
상황의 반전을 믿을 수 없었지만 엘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눈치챈 김소연은 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그는 단톡방을 열어 노예슬이 무릎을 꿇은 사진을 찍어 올렸다. 단톡방 알림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다들 노예슬이 김소연의 무전취식 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단톡방에 올라온 건 노예슬이 김소연의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었다. 게다가 김소연의 상반신도 사진 속에 담겨있었다.
사진을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김소연이었다. 단톡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김소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엘을 쳐다봤다. 이 남자는 방금 그녀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는 걸 들었을 게 분명했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를 지닌 남자는 태도가 차갑고도 오만해 보였다. 노예슬이 눈이 먼 게 아니고서야 어찌 그를 양아치로 착각한단 말인가.
김소연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몇 글자를 타자하기 시작했다.
[밥 먹는데 옆에 무릎 꿇는 사람도 있으니 기분이 좋네.]
조금 전까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소연이었다. 단톡방에서 산다하는 집안 자식들이 열띠게 가격을 제시하며 떠들 때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 갑자기 한마디를 올리자 단톡방은 순간적으로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때 엘이 노예슬을 향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는?”
노예슬은 두 손을 떨며 단톡방을 열었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경찰서에 끌려갈 수는 없었기에 결국 떨리는 손으로 타자했다.
[소연아, 미안해.]
노예슬의 사과가 올라오자 단톡방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몇 초 후 앞서 김소연을 조롱하던 동창들도 하나둘 사과하기 시작했다.
[소연아, 미안. 아까는 내가 너무 경솔했어.]
[그냥 장난이었어. 용서해 줘.]
김소연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묵묵히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과묵하지만 결단력 있는 모습이 특별히 멋지게 느껴졌다.
남자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김소연의 시선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레스토랑의 보안 요원에게 무언가를 시켰다.
“방금 이 여자가 내 턱을 만졌으니까 손목부터 해결해.”
곧 노예슬의 비명이 레스토랑에 울려 퍼졌다. 김소연은 남자가 태연한 표정으로 무심히 한마디 하는 것도 들었다.
“난 양아치라 배상은 못 해줘. 그러니까 경찰 불러봐야 너한테 좋을 게 없어.”
노예슬의 눈에서는 독기가 뚝뚝 흐를 듯한 증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이 양아치 같은 남자가 두려웠다. 그들이 떠난 뒤에야 고통에 못 이겨 신음을 터뜨렸다.
“김소연,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 은지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김소연은 노예슬이 김은지에게 고자질할까 봐 두려워할 리 없었다. 남자에게 이끌려 차에 올라탄 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아까는 고마워요. 덕분에 속이 시원하네요.”
“그래도 아내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아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묘하게 낯설면서도 섹시하게 들렸다. 말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귀끝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가 곧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소연 씨랑 함께 앉아 있으니까 내가 양아치가 돼버렸네.”
“...”
그의 말에서 어딘가 묘하게 책망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다만 엘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정서우가 한참 잘 못 짚었다. 엘은 양아치 패거리 우두머리가 아니었고 로즈가든 지배인을 마음대로 지시하는 걸 보면 적어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
다음 날 병원.
노예슬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깁스한 팔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김은지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일러바쳤다.
“은지야, 그 단톡방 일이 다 퍼졌어. 나 이제 완전 웃음거리가 됐다니까! 김소연이 내 뺨을 친 건 곧 네 뺨을 친 거나 다름없어. 네가 꼭 이 치욕을 갚아줘야 해!”
김은지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블랙 카드는 어떻게 된 거야?”
“몰라. 갑자기 결제가 안 됐어. 근데 그 양아치랑은 상관없을 거야. 그놈이 자기 입으로 양아치라고 말했거든.”
그 말을 들은 김은지는 안심하며 속으로 비웃었다.
‘김소연이 어떻게 돈 많은 남자를 만났겠어. 블랙 카드는 아마 로즈가든 주인이 정지시킨 걸 거야. 그런데 내가 언제 그 주인을 건드렸지?’
김은지는 답답한 마음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허정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은지야, 지금 병원이야? 우리 엄마가 손주 보고 싶다고 하시네. 같이 산부인과 가서 검사 좀 받아보면 어떨까?”
그의 목소리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김은지는 순간 굳어버렸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이렇게 서둘러? 아기는 아직 3개월도 안 됐잖아. 지금은 보이지도 않아! 좀 더 지나서 보여줄게.”
“하지만...”
“우웩! 오빠, 나 또 입덧이 나려 해...”
김은지는 일부러 헛구역질을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 알았어. 내가 일 끝나고 바로 갈게.”
허정우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김은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예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지야... 그 아기 말이야...”
김은지는 잠시 침묵했다. 사실 허정우를 부추겨 김소연을 납치할 때 그녀는 허정우를 속이기 위해 임신을 꾸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말이 드러날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그녀도 진짜 아기를 가지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두 번의 유산을 겪은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임신이 힘들었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굴리던 김은지는 뭔가 떠오른 듯 노예슬을 바라보며 냉소를 띠었다.
“내가 너 대신 화풀이 해달라며? 그럼 김소연이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아봐.”
지금 허정우는 아기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만약 아기 문제를 김소연에게 뒤집어씌우면 그가 김소연을 가만둘 리 없었다.
그렇게 되면 김은지는 더 이상 김소연이 자신을 위협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노예슬은 즉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바로 알아볼게.”
...
호텔.
김소연은 몰래 객실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목표는 한울 그룹의 소주주 중 한 명의 약점을 잡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돈과 여자를 밝히는 타입이라 조종하기 쉬워 보였다. 이번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에서 김은지를 확실히 이기기 위해 내부 협조자가 필요했고 그를 적임자로 판단했다.
“쯧쯧, 나이도 있는데 한 번에 둘이나 상대하네.”
이어폰에서 정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소연은 로비의 응접실에 앉아 가슴에 달린 소형 카메라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서우가 신호 상태가 나쁘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김소연은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여유를 가졌다.
그때 뒤에서 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언니를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
김은지가 우아한 몸짓으로 다가와 김소연 앞에 앉으며 말했다.
“아까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정우 오빠와 내 아기가 정말 건강하게 자라고 있대. 이거 봐.”
김은지는 그렇게 말하며 초음파 사진을 꺼내 들었다.
김소연의 얼굴에 흔들리는 기색이 보이길 기대했지만 그녀는 전혀 관심 없는 표정으로 물을 마셨다.
김은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갑자기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언니, 사실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사과하기 위해서야.”
차갑게 눈을 들어 올린 김소연이 김은지를 바라보며 가소로운 웃음을 지었다.
“뭘 사과하겠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