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김소연은 옷장 문을 살짝 열고 틈으로 내다보았다. 그때 김은지가 방에서 나오자 뒤이어 방 안에 있던 남자가 쫓아 나오며 능글맞게 말했다.
“은지야, 난 네 첫 남자였잖아. 이제 허정우 붙잡더니 나를 잊은 거야?”
“또 뭘 원하는데?”
김은지가 차갑게 대꾸하자 남자는 비웃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재벌일 때는 네가 이러지 않았지. 이제 내가 망해서 돈이 없으니 네 태도가 이거냐? 너 지금 한울 그룹 대표이사잖아. 조금이라도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김은지는 지갑에서 수표를 한 장 꺼내 그에게 던졌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
하지만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뭐가 그렇게 급해. 가기 전에 한 번만 할까? 넌 갈수록 더 예뻐지네.”
그러더니 갑자기 김은지를 끌어안으려 했다.
“놔! 이 자식아!”
김은지는 필사적으로 몸을 빼내며 문 쪽으로 달려갔다.
옷장 안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김소연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방 안의 구조와 두 사람이 얽혀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허정우는 김은지가 순수한 척하는 걸 믿고 있겠지. 저 여자의 이중적인 사생활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김소연은 냉소를 지으며 입술을 살짝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이 문을 나서자 김소연도 휴대폰을 넣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휙 돌리고서야 비로소 바로 뒤에 엘이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옷장이 이렇게 좁았던가?’
김소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옷장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그가 계속 허리를 잡고 있었던 것도 이제야 기억났다.
게다가 방금 사진을 찍느라 몸을 숙였을 때 그녀의 등이 그의 아랫배 부근에 맞닿아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성 특유의 향과 강렬한 숨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에, 엘?”
김소연은 작은 목소리로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이 남자의 목 아래를 스쳤다.
이윽고 엘의 목울대가 아래로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의 턱선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묘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움직이지 마.”
“네?”
낮게 잠긴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김소연은 얼굴 가득 당황한 기색을 띠며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순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뒤로 물러서다가 퍽 소리를 내며 옷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김소연은 재빨리 문 쪽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남자는 날카로운 눈썹을 잔뜩 좁히고 옷장 밖으로 나왔다. 그는 오늘 비교적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상의는 가죽 재킷이었는데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젊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넓고 단단한 어깨와 깊은 눈매가 어우러지며 다소 거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김소연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여기저기 흩뜨리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매섭지만 묘하게 장난스러운 눈빛을 띠며 입을 열었다.
“정상이야. 아니면 아이가 어떻게 생겼겠어?”
“...”
그 말에 당황한 김소연은 배 째라는 식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황급히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남자는 도망치는 그녀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며 예쁜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복도를 나와 한참을 걸은 김소연은 벽에 기대어 식은땀을 닦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뒤따라오던 남자는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설마 하루 종일 밥을 안 먹은 거야?”
“내 아이를 이렇게 대한다고?”
그러고는 살벌한 눈빛으로 그녀의 배를 응시했다.
남자의 단호한 말투에 김소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4시가 넘어 있었다.
김소연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단호히 명령했다.
“당장 가서 밥부터 먹어.”
김소연은 그의 권위적인 태도에 반항할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로즈가든의 레스토랑 구역으로 향했다. 정교한 장식과 분수대가 어우러진 고급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훤칠한 남자는 직접 지배인에게 임산부용 특별 메뉴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김소연은 그의 측면을 바라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 전체는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인 존재감과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잘생긴 얼굴일까? 아니면 실망스러운 얼굴일까?
“두 분 함께 드시겠습니까?”
“난 임산부 메뉴는 안 먹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김소연은 자기 배를 만지며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번쩍 들어 남자를 바라보자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김소연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당신도 하루 종일 밥을 안 먹은 건 아니죠?”
남자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대꾸하지 않았다.
김소연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테이블 위의 접시를 그의 쪽으로 슬쩍 밀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고 김소연은 그의 완벽한 식사 예절에 감탄하며 몰래 지켜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그릇에 채소와 옥수수, 등을 덜어주었다.
김소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이런 거 안 좋아해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아이가 좋아할 거야.”
“...”
김소연은 그의 단호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한 달도 안 된 아기가 야채를 좋아한다니, 무슨 저런 억지가 다 있어.’
그녀는 포기한 듯 야채를 씹으며 생각했다.
‘그래, 나는 그냥 도구일 뿐이야...’
김소연이 음식을 먹으며 속으로 울적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여자가 다가와 식탁 앞에 멈춰 섰다. 이어 찰칵하는 카메라 소리가 울렸다.
“어머, 소연아. 네가 여기서 밥을 먹고 있을 줄이야?”
그 여자는 비웃음을 띠며 히죽거렸다.
김소연은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다름 아닌 노예슬이었다. 김은지의 절친이자 한통속인 여자.
노예슬은 김소연을 향해 증오 어린 눈길을 보냈다. 대학 시절 김소연과 같은 학과에 다녔지만 김소연은 언제나 그녀보다 뛰어났다. 학업, 외모, 심지어 장학금까지 독차지하며 엄친딸로 불렸다. 심지어 그녀가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마저 김소연에게 빼앗겼다.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창피만 당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김소연의 화려했던 과거를 질투했던 노예슬은 그녀의 몰락을 고소해했다.
노예슬은 김소연의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비웃었다.
“아, 너 인질로 잡혔을 때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더라? 게다가 지금은 양아치 같은 남자랑 산다는 소문도 돌던데, 혹시 이 남자야?”
엘을 향해 시선을 돌린 노예슬은 그의 강렬한 분위기에 잠시 움찔하더니 곧 그가 입은 가죽 재킷을 보고는 눈가에 경멸이 스쳤다.
로즈가든처럼 고급스러운 장소에 이렇게 입고 올 사람은 없었다. 분명 양아치가 틀림없었다.
“가면까지 쓰고 있네. 엄청 못생겼나 봐?”
“푸훗.”
하마터면 물을 뿜을 뻔한 김소연은 얼른 엘의 반응을 살폈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엘은 젓가락질을 멈췄다.
김소연은 엘이 불쾌해할까 걱정되어 고개를 들었다.
“예슬아, 그만 꺼져 줄래?”
“꺼져야 할 사람은 너지. 돈도 없는 거지가 양아치 같은 남자랑 여기서 무전취식이라도 하려는 거야? 아니면 내가 이 장면을 생중계해 줄까?”
노예슬은 히죽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김소연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알림이 왔다. 화면을 확인하자 노예슬이 방금 찍은 사진을 대학교 동창 단톡방에 올린 것이었다.
사진에는 김소연과 엘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고 아래에는 비아냥거리는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 학교 여신이자 재벌가 딸이었던 김소연이 양아치 남친이랑 무전취식 중? 대박, 내가 생중계해 줄게. 곧 지배인한테 쫓겨나는 모습까지!]
그 글은 단톡방을 순식간에 뒤집어놓았다.
과거 김소연을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들까지 실망한 듯 조롱했다.
[어떻게 이렇게 추락했냐? 양아치랑 사귀다니, 참.]
[뉴스에서 납치 사건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존나 쓰레기네.]
[야, 양아치 말고 나랑 한 번 어때?]
[예슬아, 얼마면 되는지 물어봐 줘.]
[얘 임신했다며? 200만 원만 줘도 충분할 것 같은데.]
몇 분도 안 돼서 김소연은 단톡방에서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차갑고 무덤덤한 김소연의 모습이 노예슬을 더욱 자극했다.
노예슬은 손가락으로 김소연의 볼을 꼬집어 흔들며 비웃었다.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단톡방에서 널 술집 여자처럼 경매하고 있잖아.”
그때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았다. 주변의 공기가 한순간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하지만 노예슬은 엘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우쭐한 태도로 다가갔다.
“너 여기 얼마나 비싼덴 줄 알아? 김소연이 돈 한 푼 없는 거지인데 같이 무전취식할 셈이야?”
그러더니 대담하게 엘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몸은 괜찮네. 이 밥값은 내가 은혜를 베푸는 셈 치고 내줄 테니, 나랑 가자. 이제 김소연은 너 같은 양아치와도 어울릴 수준이 못 돼.”
노예슬은 엘을 김소연에게서 떼어놓으려 했다. 머릿속에는 김소연을 짓밟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나한테 은혜를 베푼다고?”
남자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라도 들은 듯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김소연은 저도 모르게 오싹해졌다. 엘의 정체는 모르지만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편 그가 흥미를 보인다고 착각한 노예슬은 블랙 카드를 꺼내 김소연의 눈앞에 대고 흔들며 냉소를 흘렸다.
“이거 은지가 가진 블랙 카드야. 정우가 은지를 위해 만든 거지. 너도 예전에 이곳에 자주 왔다며? 근데 정우가 너한테 블랙 카드도 안 만들어줬다며?”
김소연은 블랙 카드를 보며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허정우가 김은지를 위해 블랙 카드까지 만들어줬다니...
돈을 아끼느라 김은지에게 블랙 카드를 만들어주지 않은 건 차라리 사소한 일이었다. 과거 허정우는 고객들 앞에서 체면을 세우는 데 온 신경을 썼지만 정작 김소연은 배를 곯아야 했다.
김소연의 얼굴에 서린 싸늘함을 본 엘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피식 웃으며 노예슬에게 물었다.
“블랙 카드로 나를 대접하려고?”
퍼뜩 정신을 차린 김소연은 엘이 대체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