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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해? 방금 같은 상황에서 널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지. 나 말고 다른 직원들한테 물어봐. 널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서주현은 분노했다. 늘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부잣집 사모님인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사과를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요.” 장세호가 먼저 입을 열어 이지아의 편을 들자 서주현의 안색이 돌변했다. 서주현의 딸도 운성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지금 장세호가 이지아를 도와 말을 하고 있는 중에 자신이 사과하지 않고 버틴다면 그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줄 것 같았다. 만약 장세호가 서주현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그녀의 딸도 좋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서주현은 지금까지 딸 덕분에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그녀가 딸의 앞길을 방해했다는 걸 남편이 알게 되는 순간 끝장이었다.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떠올린 서주현은 망설이다 결국 이를 악물고 마지못해 이지아를 바라보며 사과했다.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오연주는 항상 자신을 무시하던 서주현이 전에 없이 사과하자 마음속이 그 어느 때보다 유쾌했다. 그러나 오연주가 입을 열어 비아냥거리기도 전에 장세호의 서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쪽은 어머니가 돼서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에 딸이 물건을 훔쳤다고 단정 지으면 안 되죠. 친딸 맞아요?” “저...” 오연주는 무슨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엄숙한 장세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연주와 서주현을 힐끔 쳐다본 이지아는 이젠 흥미가 사라져 더는 이곳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계속 쇼핑하세요. 전 먼저 갈게요.” 오연주에게 인사를 건넨 이지아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돌려 주얼리 가게를 벗어났다. 이지아가 버스 정류장 옆까지 걸어갔을 때 차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곧이어 차창이 내려가고 이지아는 방금 주얼리 가게에서 마주쳤던 장세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어디 가? 내가 태워줄게.” 이지아도 사양하지 않고 차 문을 열어 뒷좌석에 앉았다. “남동구 연화로 55번지로 가주세요.” 장세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단순히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지아도 잘 알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지아가 차에 타자 장세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운성 고등학교에 다닐 생각 없어?” “운성 고등학교에서 소년원에 다녀온 학생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지아가 소년원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몰랐던 장세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운성 고등학교는 평소 수많은 사람들이 인맥을 이용하여 장세호에게 입학을 허가해 달라고 부탁하는 강현시 최고의 고등학교이다. 그런데 이지아는 장세호가 직접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원에 다녀왔다는 약점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밝혔다. 원래 이지아의 해커 기술이 마음에 들었던 장세호는 이젠 그녀의 성격도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네 기술을 보지 못했다면 오연주 씨가 사람을 찾아 나한테 부탁했어도 입학 기회를 주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방금 주얼리 가게에서 네 행동을 보고 이례적으로 너는 운성 고등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비록 과거 이지아가 왜 소년원에 가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장세호는 인재를 아끼는 사람이다. 이런 인재를 눈앞에 두고 놓칠 수는 없었다. 학교에 입학 후 이지아가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장세호는 이전의 일을 묻어둘 수 있었다. 장세호의 말을 들은 이지아의 표정은 동요 없이 고요했다. “운성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컴퓨터 시험이 없는 거 아니에요?” “운성 고등학교에서는 컴퓨터 시험이 없지만 각지에서 진주대에 컴퓨터 인재를 추천하는 정원이 있어. 네가 운성 고등학교로 와준다면 너를 진주대 컴퓨터학과에 추천해 줄 수 있어.” 장세호는 오늘 주얼리 가게에 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이지아가 가지고 있는 해커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이 드러나게 되면 강현시의 다른 학교에서 그녀를 빼앗으려 혈안이 될 것이 분명했다. 비록 학교마다 추천 정원이 있지만 모든 학교에서 추천하는 학생이 전부 진주대 컴퓨터학과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주대요?” 이지아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언젠간 그녀는 진주로 돌아가야 한다. 전생에 이지아는 어린 나이부터 귀족 학교에 입학했고 일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신분이 바뀐 지금 이지아는 전과는 다른 인생을 체험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지금 바로 입학 통지서를 줄게.” 장세호는 서류 가방에서 입학 통지서를 꺼내 성명란에 직접 이지아의 이름을 적은 후 하단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며칠 뒤면 개학이니까 입학 통지서를 가지고 운성 고등학교로 오면 돼. 내가 입학 절차를 도와줄게.” 다음날 오후, 오연주는 이지아와 이유영을 데리고 강현시 도연동의 고급 호텔로 향했다. 이번 그림 전시회가 이곳 호텔 1층 연회장에서 열렸다. 이유영과 오연주는 이번 그림 전시회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기에 화려한 옷차림으로 참석했다. 오연주는 이지아를 전시회에 데리고 갈지 말지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갈등했지만 서주현의 도발 섞인 전화 한 통에 이지아를 데리고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서주현의 입이 얼마나 가볍고 대단한지 오연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림 전시회에 이지아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오연주는 사모님들 모임에 완전히 발붙이고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오연주는 이지아가 그림 전시회에서 자신의 체면을 구길까 걱정되어 비싼 원피스를 사주었고 집을 나서기 전에는 원피스를 더럽히지 말라고 반복해서 이지아에게 당부했다. 호텔에 도착해 전시회를 둘러본 이유영은 작은 목소리로 오연주에게 말했다. “엄마, 저쪽에 계시는 분이 국내 유명한 화가 소진명 화가님이에요. 전해 듣기로는 진영우 화가님이 가장 아끼는 제자라고 해요.” “우리도 가서 인사하자!” 오연주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얼른 이유영과 이지아를 데리고 소진명에게 다가갔다. 소진명과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오연주는 특별히 이지아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따가 넌 내 뒤에 서서 조용히 하고 있어!” 오연주는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지아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실례지만 소진명 화가님이신가요?” 이유영은 먼저 소진명의 곁으로 다가서며 대범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현시 운성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유영이라고 합니다. 전에 화가님의 그림책을 산 적이 있는데 정말 화가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특히 화가님의 탄탄한 소묘 기법을 존경해요. 제가 봤을 때 화가님은 모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서 표현하시는 거장이신 것 같아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저도 화가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한 점의 그림을 감상 중이던 소진명은 이유영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진명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이유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이에 그림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투철할 줄 몰랐네.” “이분은 제 어머니이시고 옆은 언니예요.” 이유영은 고개를 돌려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뒤에 있는 오연주와 이지아를 소개했다. 오연주는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이지아를 자신의 뒤에 감추었다. “소진명 화가님, 안녕하세요! 딸아이한테서 종종 화가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딸아이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님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전시회에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소진명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말씀을. 과찬이세요.” 소진명이 내뱉은 말은 겸허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의기양양한 기색이 역력해 오연주와 이유영이 은근히 추켜세우는 말이 퍽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이지아는 오연주와 이유영에 의해 가로막혀 소진명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지아는 이유영이 말하는 국내 유명 화가를 알고 싶은 생각이 없어 고개를 돌려 주위의 그림을 감상했다. “화가님, 제게 화가님과 함께 그림을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어요?” 형식적인 인사말을 나누고 나서 이유영은 소진명에게 부탁했다. “그래, 같이 보자.” 소진명은 말을 하며 다른 그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영은 소진명의 곁을 따라다니며 이따금씩 그림에 대한 평가를 했다. 이유영은 미리 인터넷을 통해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의 상세한 자료를 조사하고 공부한 내용을 많이 외워두었다. 눈앞에 있는 작품들에 대해 평가하는 이유영의 말에는 근거가 충분하고 내용이 충실하여 소진명은 그녀에 대한 호감이 상승했다. 몇 점의 그림을 감상한 후 소진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예대 입시를 보고 진주대 미술과에 진학할 생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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