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아영은 고연화가 몹시 긍정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한 달을 준비한 프로젝트 기획안이 이렇게 물거품이 되다니, 정말 기운 빠졌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탕비실로 향했다.
“연화 씨, 수고해요. 전 가서 커피 타다 줄게요.”
“고마워요!”
고연화가 담담하게 대꾸한 순간 그녀의 컴퓨터 모니터에 붉은 프로그래스 바가 나타났다.
프로그래스 바가 가득 차자 고연화는 순식간에 비밀번호를 풀어냈다.
은밀한 대화창을 누른 그녀는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전송했다.
[무슨 원한인 건데?]
해커 쪽에서 크게 놀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너! 너는 누구야? 감히 우리 AJ 연맹의 최종 기밀 시스템에 역해킹을 하다니!]
고연화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중요한 건 왜 A 회사를 공격하냐는 거야? 무슨 원한이 있으면 원수 진 사람한테 가서 따져야지, 무고한 사람들의 노동 성과를 망치면 어떡해!]
해커 쪽에서는 지지 않고 곧바로 반격했다.
하지만 상대가 미리 설치한 방화벽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가로막혀버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기술이 자신보다 훨씬 높은 정체 모를 상대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
장아영이 커피를 들고 돌아왔을 때 고연화의 컴퓨터는 이미 수리가 끝났고 모든 파일이 원상 복구되어 있었다.
“진짜로 고쳤네요! 연화 씨, 너무 대단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한 거예요?”
뽑은 USB를 엄지에 걸고 빙그르르 돌리며 의자에 나른하게 몸을 기댄 고연화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인터넷에서 990원 특급 할인으로 산 백독불침의 백신 프로그램 덕분이에요. 보아하니 과장 광고는 아니었나 봐요! 이따가 별점 다섯 개를 남겨야겠어요!”
그 말에 장아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 투덜거렸다.
“하? 진짜요? 정말로 백신 프로그램으로 고친 거예요? 흥, 기술팀에서는 백신 프로그램도 소용없다고 하더니, 내가 보기엔 기술팀이야말로 제일 소용 없는 것 같아요!”
고연화는 장아영에게서 커피를 받아 든 뒤 턱짓했다.
“됐어요, 얼른 PPT 복사해서 조 대표님에게 보여주지 않고요!”
“아, 참! 저 지금 바로 갈게요! 연화 씨, 사랑해요!”
장아영은 고연화에게 손 키스를 날린 뒤 얼른 서둘렀다.
동료들이 갑자기 몰려들더니 고연화에게 백신 프로그램의 링크를 달라고 난리였다,
고연화는 느긋하게 그들의 말에 대꾸해 줬다.
“다들 급해 말아요, 이따가 제가 단톡에 올려줄게요!
그녀는 느긋하게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까마귀 날개 같은 속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그녀는 조 대표 사무실 쪽을 쳐다봤다.
그 이상한 아저씨, 커피 한 잔 아직 다 못 마셨겠지?
……
사무실.
소미연은 허태윤에게 커피를 내 온 뒤 흰 다리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각종 섹시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허태윤의 주의를 끌 수가 없었다. 되레 다리만 저려왔다.
장아영은 조용히 노크한 뒤 안으로 들어와 얘기했다.
“조 대표님, PPT 준비됐습니다. 예정된 회의실에 들어가셔도 됩니다.”
조심스럽게 허태윤과 함께 커피를 마시던 조공성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컴퓨터 고쳤어?”
장아영은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 대표님! 연화 씨가 벌써 컴퓨터 고쳤어요!”
“하, 재주는 있군!”
내내 마음 졸이고 있던 조공성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허 대표님, 회의 자료는 이미 전부 준비되었으니 회의실로 가시죠. 저희 회사 새로운 프로젝트의 책임자에게 저희의 새 프로젝트에 대해 제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커피를 들고 있는 허태윤의 손은 마디가 굵고 몹시 길었다.
그 말을 들은 허태윤은 의미심장하게 두 눈을 가늘게 뜬 뒤에야 커피를 내려놓고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숙한 남자의 행동거지에는 강압적이고 고귀한 매력이 드러났다.
송미연은 화가 나 이를 악물었다.
그 고연화가 정말로 고쳐내다니!
……
15분 뒤, 허태윤은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윽한 얼굴은 무표정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조공성은 공손하게 그 뒤를 따르며 배웅했다.
고연화의 자리를 지나치던 허태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깃 쳐다보던 그의 입가에 불순한 미소가 걸렸다.
“조 대표님, 귀 회사의 이 인재덕에 성공적으로 제 시간을 한 시간이나 지체했네요!”
조공성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어… 허 대표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시선을 거둔 허태윤은 고연화에게 더는 시간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고연화가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때 송민연이 깨고소하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고연화, 당신이 컴퓨터를 수리할 줄 알면 뭐 어때? 허 대표님께서는 여전히 그쪽들 그 기획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잖아.”
송미연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고연화는 고개를 도려 이제 막 회의실에서 나온 장아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영 씨, 어떻게 된 거예요?”
장아영은 풀이 죽은 얼굴로 울먹이며 말했다.
“연화 씨, 무슨 이유인지 PPT에 중요한 수치에 오류가 있었어요. 허 대표님이 우리의 기획안을 쓰레기라고 했어요…”
고연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허태윤을 배웅한 조공성이 돌아오더니 굳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장아영, 너 뭐 하는 애야! 이런 기본적인 실수가 어떻게 여러 번이나 나타날 수가 있어! 일하기 싫으면 일 그만두지 그래!”
장아영은 죄책감에 연신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조 대표님! 저…”
고연화는 송미연의 얼굴에서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우쭐한 웃음을 발견하고는 이번에도 그녀의 수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조 대표님, PPT에 오류가 나타난 건 아영 씨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비록 컴퓨터를 고치긴 했지만 바이러스는 일부분의 원본 파일을 훼손했고 그 때문에 PPT의 데이터가 뒤엉켰기 때문이에요. 제가 아영 씨에게 확인한 다음에 회의에 가져가라고 하지 않았으니 제 잘못입니다. 책임지고 퇴사하겠습니다!”
조공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연화를 쳐다봤다.
조 대표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진 팀장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퇴사? 무슨 허튼소리야! 고연화, 너는 해고된 거야. 당장 짐 싸서 썩 꺼져버려. 여기서 조 대표님 화나게 하지 말고!”
고연화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쫓아 나온 장아영이 한껏 미안한 얼굴을 했다.
“연화 씨, 가야 할 사람은 저예요…”
고연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영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진 팀장은 원래 절 해고시키려고 했고, 아영 씨까지 말려들 필요는 없어요.”
장아영이 불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연화 씨가 이렇게 가버리면 송미연은 정직원으로 전환이 되잖아요. 분명 모든 능력에서 연화 씨에게보다 밀리는데, 이러는 거 너무 송미연만 좋은 일 시키는 거잖아요!”
고연화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뒤 장아영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고연화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데 바로 옆 엘리베이터도 마침 문이 열렸다.
송미연이 옆에서 나오더니 사무용품 한 상자를 고연화 앞에 내던졌다.
“이 쓰레기들 갖고 가는 거 깜빡한 거 같아서. 팀장님이 그러셨는데 네 그 자리 비워서 내 사무실 만들어주신대!”
고연화는 담담하게 지신의 물건을 주웠다.
“송미연, 그래도 동료 사이였는데 충고 한마디만 할게.”
송미연은 승리자의 자태로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 할 말 있으면 어디 해봐!”
은근한 미소를 지은 고연화가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인성이 부족하면 언젠간 다 돌려받게 될 거야!”
송미연은 그 말에 흠칫했다.
“흥!”
져서 떠나는 주제에, 겁 주기는!
…
자신의 물건들을 챙겨 빌딩에서 나오는 고연화의 앞에 한정판 메르세데스 SUV 차량이 갑자기 그녀의 옆에 멈췄다.
정 비서가 조수석에서 내리더니 말했다.
“서정희 씨, 대표님께서 타시랍니다.”
고연화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를 지나쳤다.
“서정희 씨, 차에 타시죠!”
아무리 돌아가도 지나칠 수가 없자 고연화는 굳은 얼굴로 마지못해 차에 탔다.
마침 송미연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원래는 회사 입구에 한정판 외제차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에 나와서 구경을 하려던 건데, 고연화가 그 외제차에 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송미연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 차는 무려 메르세데스 한정판인데, 고연화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저렇게 좋은 차에 탄단 말인가?
그럴 자격이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