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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고연화는 이미 남자의 티셔츠로 갈아 입은 뒤였다. 차창을 열어 공기가 통하자 추위를 느낀 그녀는 아예 남자가 방금 그녀의 몸에 덮어준 외투도 함께 껴입었다. "고연화씨, 실직했다면서요?" 고연화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차창 밖 거리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굵고 울림 있는 허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연화는 입꼬리를 살짝 움직여 대답했다. "네. 아저씨 덕분에요!" 허태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손에 든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기회를 줬지만, 당신들 기획안이 문제 있었던 것뿐이에요. 내 기준에 따르면 그런 기획안은 투자할 가치가 전혀 없어요." 고연화는 졸음이 몰려와 살짝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네. 저는 이제 A회사 직원이 아니니 아저씨도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실 필요 없어요." 손을 뻗어 서류 한 페이지를 넘긴 허태윤이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다른 회사를 찾고 싶다면...." "기사 아저씨, 앞에 좀 세워 주세요!" 고연화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남자의 말을 끊고는 창문에 딱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고연화는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자마자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으로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 막 도착한 버스에 뛰어올랐다. 그녀는 창가 쪽 자리를 찾아 앉더니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뒤에 있는 메르세데스를 향해 경멸의 의미로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을 다운 시켰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작은 손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정시후는 정신이 아찔했다. ‘고연화씨는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네. 서울, 아니 전국을 통틀어 감히 대표님 앞에서 저렇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말이야.’ "대표님, 오후에 있을 세계무역센터 준공식에도 참석해야 하는데 도련님 외투를 고연화씨가 입고 갔으니 어쩌죠…." "그럼 새로 한 벌 가져오라고 해.” 허태윤은 눈을 내리깔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계속 뒤적였다. "네!" 정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표님, 조금 전 아가씨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연락왔습니다." 허태윤이 고개를 살짝 들고 물었다. "갑자기 병원은 왜?" 정시후가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고연화씨가 아가씨의 머리를 변기물에 처넣은 탓에 아가씨가 변기물을 몇 모금 마셨다더군요. 도련님도 알다시피 아가씨가 결벽증이 있잖아요. 하여 아침부터 계속 토하다가 탈수 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가 링거를 맞는 중이랍니다.” "의사가 뭐래?" "의사의 말로는 큰 문제 없다더군요. 링거를 맞고 나서 음식을 좀 먹은 뒤 한 이틀 몸조리하면 괜찮을 거랍니다. 다만, 아가씨가 지금 대표님을 불러와 고연화씨를 혼내주라고 난리 치는 중이랍니다.” 허태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 않고 말했다. "할머니가 허윤진을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에 애가 너무 제멋대로야. 고연화씨는 비록 강직한 편이지만 자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아니지. 허윤진도 이번에 교훈을 좀 얻고 나면 앞으로 성질머리를 좀 고치겠지. 신경 쓰지마.” 흠칫 놀란 정시후가 속으로 생각했다. ‘대표님은 고연화씨한테 각별히 너그러운 것 같네.’ 그는 잠깐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돌려 지시를 청했다. "그... 오늘 고연화씨가 실직했으니 일자리 하나 마련해 줄까요?" 허태윤이 덤덤히 대답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석 달 동안 그녀가 허씨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짓만 하지 않게 잘 지켜봐." "네!" 정시후는 대표님이 고연화씨에게 남다른 감정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어쩌면 너무 앞서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긴! 대표님 마음속에는 오직 강씨 가문 아가씨뿐이지. 그렇게 오랜 세월 변한 적이 없으니. 다만 두 집안이 원수지간이라 두 사람이 이뤄지기는 어렵지. 대표님도 그것 때문에 줄곧 혼자 시고, 회장님께서도 그렇게 빨리 결혼하라고 강요하시는 거겠지.’ ****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한 고연화는 일단 짐을 쌌다. 앞으로 그 이상한 아저씨와 함께 허씨 가문에서 석 달을 보내야 하는지라, 계속 그의 옷을 입고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녀는 연예계 생활을 접고 집에서 대기중인 고설아와 마주쳤다. 고연화 앞에서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고설아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곧바로 비아냥댔다. "너였어? 난 배달이 온 줄 알았잖아!" 고연화는 고설아와 쓸데없이 실랑이 하고 싶지 않아 그녀를 에돌아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고설아는 거기서 멈추고 싶지 않아 그녀 앞을 가로막고는 깔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연화, 너 지금 남자 옷을 입고 왔어? 어제 집에 돌아오지 않더니, 설마 밤새 남자랑 뒹굴다 온 거야?" 고연화가 미처 설명하기도 전에 고설아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아빠! 엄마! 빨리 나와서 봐봐! 고설아가 뭘 입고 왔는지 봐!" 그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온 고백천은 고연화의 몸에 걸쳐진 남자 옷을 보고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연화야, 너 왜 남자 옷을 입고 있니? 어젯밤에도 집에 안 들어오고. 도대체 뭐 하다 온 거야?” 뒤따라 나온 류예화가 그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당황한 척했다. "말... 말도 안 돼! 연화야, 넌 시집도 안간 처녀가 어찌 남자 옷을 입고 돌아다니니? 우리 집안은 그런 집안이 아니다!" 고설아도 곧바로 맞장구 쳤다. "아빠, 연화 저 애는 전에 우리 엄마가 소개해준 괜찮은 맞선 상대도 만나려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이유가 설마 밖에서 아무 남자랑 밤을 보내기 위해서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 말을 들은 고백천의 안색이 더욱 험악해지더니 분노를 억누를 수 없어 호통쳤다. "연화 너, 어디 똑똑히 말해봐.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 도대체 어디서 난 거야?" 고연화는 침착하고도 담담하게 고백천에게 설명했다. "아버지, 제 옷이 실수로 더럽혀져 임시로 다른 사람에게 옷을 빌려 입었을 뿐이에요. 이 옷도 깨끗이 씻어 돌려줘야 해요." 고설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빌렸다고? 그 말을 믿으라고?" 고백천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럼 어제는 뭘 했기에 밤새 돌아오지 않았어?" 고연화가 대답했다. "어제는 방을 구해서 그곳에서 하룻밤 묵었어요. 오늘은 짐 싸러 돌아왔는데 앞으로는 나가서 지낼 거예요." 그녀는 허씨 가문 저택을 자신이 구한 전세방이라고 생각했다. 임대료는 바로 석 달 동안의 자신의 시간이었고 말이다. 고백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가서 살겠다고? 멀쩡한 제 집이 있는데 어디로 이사하겠다는 거야?” 류예화가 옆에서 비꼬듯 말했다. "여보, 연화 저 애가 설마 남자 집으로 들어가 동거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라니! 여자가 제 몸간수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앞으로 시집도 못 가고, 가문의 명예도 더럽혀질 거예요!" 고설아가 비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허, 밤에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아무 남자 옷이나 걸치고 왔는데 몸간수라니!" 고백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고연화를 바라보았다. 고연화는 오히려 류예화와 고설아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요, 아줌마, 언니! 저는 일반인이라,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아무도 알아 보지 못해요. 집안의 친척들조차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몇 명 없으니 제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일은 없어요.” “오히려 언니는 대스타라 그리도 유명하니, 약간의 스캔들이라도 나면 뉴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수도 있겠네요. 언니야말로 몸간수와 명성에 주의해야죠. 양심 없는 매체에서 언니에게 물주가 있다는 둥 그런 기사를 쓸 기회가 없게 말이에요. 만약 그것 때문에 시집도 못 가면, 또 아줌마가 초조해 할 것 아니에요." 고설아는 너무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고연화, 누가 시집을 못 간다는 거야?" 고연화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깜빡했네. 어제 결혼했지 참! 맞다, 언니 신랑은? 형부도 소개 안 해줄 거야?" 그 말에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분노가 치민 고백천이 어두운 표정으로 류씨 모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바로 어제의 그 웃음거리가 된 결혼식 때문에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를 당했다. 고연화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예전에는 제가 아직 학생이라 집에서 지내도 상관 없었는데, 지금은 저도 이미 성인이 되어 직장도 다니니 독립해서 살아보고 싶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설령 제가 이사를 가더라도 절대 아버지 얼굴에 먹칠할 일을 하지 않을 게요." 고백천은 고연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먹칠한 류씨 모녀와 비교해보니 막내딸은 훨씬 얌전한 편이었다. 하여 손을 저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지금 집안 분위기도 말이 아니니 나가서 살고 싶으면 나가거라." "고마워요, 아버지." 고연화는 벌레 씹은 표정인 류씨 모녀를 담담하게 흘겨보고는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고설아가 쳐들어왔다. 막 욕설을 퍼부으려던 고설아는 문득 고연화가 벗어놓은 남자 외투에 찍힌 로고를 보게 되었다. ‘뭐야!’ 그 옷은 뜻밖에도 명품 브랜드 FA의 것이었다. 그것도 상위 계열의 귀빈 맞춤형 옷이었다. ‘고연화 저 촌것이 어찌 저런 고급브랜드 남자 옷을 손에 넣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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