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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4시 57분, 평소처럼 책상을 치우고 퇴근 준비를 하던 신이서는 휴대폰이 계속 울리는데도 눈꺼풀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남자친구 고운성이다. 아마도 어제 혼담이 깨진 일 때문일 것이다. 그 뒤, 5시 정각이 되자 신이서가 휴대폰을 들고 퇴근하려고 하는 데 마침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신 여사님, 병원비6400만 31만 원을 연체하였습니다. 빨리 병원 3동 1층 로비에 가서 지급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87****로 연락하세요.] 신이서는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가 다시 힘없이 늘어뜨렸다. 지급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녀는 정말 돈이 없다. 하루당 200만 원의 중환자실은 정말로 집안의 모든 돈을 다 써버렸다. 하지만 엄마의 병은 치료되지 않아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태어난 지 열흘 만에 버려진 신이서는 양부모가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을 줬다. 아버지가 임종할 때 유일한 소원은 그녀가 엄마를 잘 돌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어찌 엄마를 구하지 않고 죽게 할 수 있으랴?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고운성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고운성은 돈이 없다고 바로 거절했다. 그녀도 강요하기가 난처하다. 어쨌든 고운성은 그녀에게 청혼했을 뿐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어제, 그는 SNS로 6천만 원의 차를 새로 샀다고 자랑했다. 당시 신이서는 1분 동안 그의 SNS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린 후 고운성에게 전화했다. 그는 설명하지 않고 도리어 긴 말을 늘어놓았다. "이서야, 난 너랑 결혼하려고 차를 샀어, 이 6천만 원은 널 위해 쓴 거야, 200만원은 전액 선금이고 나머지 4800만원은 천천히 같이 갚자." "이서야, 우리가 결혼하면 네 부모님의 그 작은 집을 팔고 우리 큰 집을 사자. 우리 부모님은 줄곧 시골에 사셨으니 이제는 큰 도시로 나와서 삶을 누려야 하지 않겠어. 우리 부모님이 날 키우느라 힘드셨는데 네가 며느리로서 좀 이해해 줘." "참, 서울 집값이 그렇게 비싼데, 그때 가서 내 월급으로 주택 대출을 갚고 네 월급으로는 우리 가족의 생활비로 쓰는 건 어때? 내가 널 이해해주지?" "어차피 너는 앞으로도 가족이 없으니, 나한테 시집오면 우리 고씨 집안 사람이야, 여자는 배려심이 깊어야 하고 너무 많은 걸 따지지 말아야 해." 신이서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나 온몸을 떨었다. 고운성이 돈을 빌려주지 않아도 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우리 집안을 송두리채 없애려고 한다! 그녀의 집까지 처리할 방법을 생각했다니, 참 그런 속셈은 뻔하다. 신이서는 잠시 마음을 추스리고 난 다음 바로 고운성의 빈곤 퇴치식 혼인을 거절했다. "고운성, 우리 헤어지자." 3년 동안 사귀었는데 슬프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좋게 헤어져야 한다. 그녀는 지금 어머니의 병원비때문에 정말 고민할 시간이 없다. 생각이 되살아나자 신이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런 불쾌감을 떨쳐 버리려 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동료들이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고운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야, 널 데리러 왔어." 신이서는 그 소리를 듣고 쳐다보았다. 멋진 양복을 입고 손에 장미꽃을 든 고운성이 새 자동차에 몸을 기대고 멋을 부리고 있다. 주변 동료들이 부러워하며 신이서를 쳐다봤다. 그녀는 오히려 그 새 자동차가 너무 눈에 거슬렸다. 마치 그녀의 3년 남짓한 감정이 고작 그 차보다도 못하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고운성은 웃으며 다가와 신이서에게 꽃을 건넸다. 주위가 술렁거렸다. "고운성, 참 로맨틱하구나, 우리 같은 싱글들은 어쩌라고." 고운성은 늘 체면이 우선인 사람이라 그 칭찬을 듣고 얼굴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이서야, 꽃 받아, 내가 새로 산 자동차를 보여줄게, 앞으로 매일 널 출, 퇴근시킬 수 있어." 주위에서 한바탕 비명을 질렀다. "어머나, 이서 씨, 너무 행복하네요. 고운성 씨가 차를 사주다니, 앞으로 내 남자친구도 이렇게 잘 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내가 이서를 얼마나 사랑하니데." 고운성의 얼굴에는 다정한 표정이 어렸지만, 눈빛은 신이서에게 빨리 꽃을 받으라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체면을 구기지 말라고. 신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노 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운성은 지방에서 올라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서울에서 노력하는 걸 안타까워 했고, 그래서 결혼할 때도 그에게 집과 자동차, 혼수를 요구하지 않고 단지 그녀에게 잘하라고만 부탁했다. 하지만 고운성은 그녀의 어머니가 중병인 것을 알면서도 한마디의 안부는 커녕 그녀의 집안을 송두리채 빼앗으려고 한다! 지금은 또 이렇게 애인한테 잘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억지로 5천만 원의 자동차 대출을 그녀한테 넘기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헤어진 것을 알게 되면 모두 그녀가 못됐다고 생각할 거다. 신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고운성을 지나쳤다. 그 순간 고운성의 웃음이 굳어버리더니 신이서의 손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이서야, 성질 부리지 마, 내가 오늘 직접 사과하러 왔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 다들 쳐다보는데 창피하지도 않아?" 이 말은 자존심을 버리고 그녀한테 꽃을 주러 왔으니 그녀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신이서는 고운성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낯설어 보인다. 원래는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후에도 그는 결혼을 고집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운이 좋게 좋은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눈이 멀어서 일찍이 그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것을 원망한다. 그녀는 앞에 놓인 꽃을 훑어보고 되물었다. "고운성, 이 차를 정말 나한테 사준 거야?" 고운성은 그녀가 굴복한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앞으로 내가 네 전속 기사야. 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널 배웅해 줄게." 주변 여자들의 눈에 부러움이 가득 찰 즘에 신이서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럼 자동차 등록증 꺼내봐, 거기에 대체 누구 이름이 적혀 있는지." "..." 고운성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하지 않다. 이상한 느낌을 눈치챈 주변 사람들이 독촉했다. "고운성, 너 이서 씨한테 자동차 사준 거 아니었어? 꺼내봐, 우리도 한번 보게." 갑자기 고운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신이서가 잔잔하게 말했다. "분명히 당신 차를 샀는데 왜 굳이 나한테 사줬다고 말해. 그렇다면 내일이라도 우리 당장 명의를 바꾸는 게 어때." 말이 끝나자 마자 모두들 고운성의 그 속셈을 알아차리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고운성은 체면을 구기는게 싫어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도, 요즘 모순이 있어서 얘가 지금 나한테 화내는거야." 말한 다음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신이서를 노려보았다. "신이서, 너무 지나치지 마. 나 말고 누가 감히 너 같이 환자 딸린 사람이랑 결혼할 수 있겠어?" 신이서는 이를 악물었다. 아름다운 눈매에 냉기가 어렸다. "걱정 마, 난 아무랑 결혼해도 너랑은 안할거니까. 네가 나랑 좋게 헤어지기 싫다면 나도 네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지." "너..." 고운성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신이서는 돌아서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나랑 고운성은 이미 헤어졌어요." 말을 마친 신이서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길목을 향해 걸어갔다. 고운성은 성난 얼굴로 그녀를 뒤쫓아 옆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 "신이서! 지금 내가 너한테 2천만 원을 안줬다고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 그럼 우리 지난 3년 동안의 감정은 뭔데?" ‘뭔데? 그냥 재수 없는 셈이지!’ "그래! 바로 그 2천만 원이야! 돈이 없어서 난 너한테 시집안가!" 신이서는 빨리 어머니를 보러 병원으로 가기 위해 더이상 그와 말다툼하기 싫어서 그의 말을 따라 대꾸했다. 고운성이 반박하려 하는데 두 사람 옆에 있던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다. 기사는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우리 가야 하니까 자리 좀 옮겨 주시겠어요?" 우리? 신이서는 옆의 컴컴한 차창을 통해 차 뒷좌석에 앉아있는 늠름한 모습 발견했다. 하지만 특수 처리된 차 창 때문에 그녀는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기사가 또 경적을 울리자 그녀는 서둘러 길을 비켜주었다. 차가 지나가면서 차 표지판과 번호판이 보였다. 마이바흐, 1111. 이런 자동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타는 걸까? 고운성이 비싼 자동차에 정신을 판 탐을 타 신이서는 곧바로 돌아섰다. 그렇지 않으면 10분 뒤 지하철을 놓치게 된다. 하지만 고운성은 또 뒤쫓아와 신이서의 손을 힘껏 잡으며 그녀를 달래려고 한다. "이서야, 자동차를 살 때 너한테 알리지 않은 건 내 잘못이야, 근데 자동차는 나중에 너도 빌려 쓰면 되잖아." 그말을 듣고 신이서는 참 웃겼다. 하여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빌려줘? 아까는 사줬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또 변덕을 부리네? 너는 정말 내가 너랑 헤어지는 게 단지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네가 나를 오해했기 때문이야! 네가 나한테 돈을 빌려주고 싶지 않는 건 참 정상적인 거야, 그건 네 돈이니까, 하지만 너는 자동차 대출을 나한테 떠넘길 필요는 없잖아! 좋은 사람인 척 행세하지 마!" 신이서의 말에 고운성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우리 엄마가 하신 말씀이 맞았어, 네가 돈을 원하는 건 네 엄마한테 보태기 위해서야! 이서야, 너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없니, 네 엄마의 병은 널 힘들게 할 뿐인데 차라리 지금부터 죽기 놔두는 게 나아. 앞으로 우리 부모님이 네 엄마 아빠야, 네가 그들에게 잘 효도하면 그들이 널 친딸로 여길 테고." 그 말을 듣자니 신이서는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리고 구토를 참으며 고운성을 노려보았다. "입 닥쳐! 죽고 싶으면 너나 가서 죽어!우리 엄마는 안 죽어!" "고운성,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너한테 나랑 결혼해달라고 강요한 적이 없어, 네가 먼저 나에게 청혼한 거야, 만약 네가 우리 엄마가 부담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나랑 헤어지면 돼, 그러면 난 네가 충분히 솔직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할 필요는 없잖아." "우리 엄마가 너한테 어떻게 해주셨는지 네가 몰라서 이러는 거야? 너한테 잘 해주고 결혼할 때는 너희 집에 돈 한 푼도 안 달라고 했는데, 너는 오히려 날 경계하면서 우리 엄마 집을 팔 생각을 해? 아예 송두리째 빼앗으려고? 너희 집은 참 처먹는 모양도 꼴불견이다!" 신이서의 말에 고운성이 격노했다. 다시 입을 열자 그의 속내가 드러났다. "신이서, 네 엄마가 잘해준 건 내가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야! 네 엄마가 나한테 아부하지 않으면, 네 까짓게 어떤 좋은 남자를 찾을 수 있겠니?" "그런 신경 안써도 돼." 신이서는 꼴도 보기 싫었다. "너... 됐다, 난 네가 화가 난 걸 알아, 진정해. 진정이 되면 다시 나한테 사과하러 와, 그렇지 않고 날 놓치면 넌 다시는 더 좋은 남자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고운성은 도도하게 꽃을 신이서의 손에 억지로 끼워 넣고 돌아서서 자동차를 끌고 떠나버렸다. 그때 찬바람이 불어와 신이서는 이성을 되찾고 곧바로 손에 든 꽃을 휴지통에 버리고 지하철역을 향해 달려갔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엄마의 치료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의 망년지우인 전수미이다. 전수미는 신이서와 지하철에서 만나 알게 된 사이다. 당시 그녀가 한 아줌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는데 전수미가 그녀의 결백을 증명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카톡을 주고 받은 뒤 뜻밖에도 그렇게 친해질 줄 몰랐다. 가끔은 데이트하면서 밥을 같이 먹고 쇼핑했다. 가끔 두 사람을 모녀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상 전수미도 그녀를 딸처럼 아끼고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신이서가 전화를 받자마자 입을 열기도 전에 전수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서야, 빨리 와서 좀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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