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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따라서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으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소중했다. 신지수는 10살 때 우연한 기회에 서적을 얻게 되었는데, 당시 표지의 글자는 이미 희미하게 번져 확인이 불가능했다. 책 속의 내용은 하나같이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나마 침술 관련 그림 설명만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결국 의서에 푹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그녀는 깜빡하고 저녁을 못 차렸다가 신정호에게 귀가 붙잡힌 채 흠씬 두들겨 맞았고, 오미란은 책을 빼앗아 불구덩이 속에 처넣었다. 물론 매를 맞고는 식사까지 준비했지만 신정우에게 쫓겨나 벌로 굶게 되었다. 그날 밤은 무려 영하 2도까지 내려간 겨울이었다.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은 그녀는 자칫 얼어 죽을 뻔했고,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기절하기 직전 통째로 외웠던 의서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내 조금씩 활용하다 보니 스스로 침을 놓고 맥박을 짚을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 이후로 신지수는 시간만 나면 명상에 빠졌고, 이러한 방식으로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의서의 모든 내용을 통달했다. 눈을 감고 침술을 몇 차례 복습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고, 곧바로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6시,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자 신지수는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 습관처럼 이불을 깔끔하게 개어놓고 나서 앞에 놓인 ‘두부모’를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전생에 신윤아가 바다에 빠져 죽은 척한 탓에 그녀가 살인자로 몰리면서 약혼자 육서진의 손에 직접 감옥에 갇혔다. 결국 ‘잘 있어’라는 한 마디를 끝으로 끔찍한 고문을 당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4년간의 감옥 생활이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굴욕과 고통뿐인 비참한 과거는 그녀에게 막다른 골목이 따로 없었다. 신지수는 대뜸 이불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어차피 이번 생에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으니 엄연히 따지면 과거는 아니었다. 이제 도마 위의 생선 같은 신지수는 없을 테니까. 앞으로 모든 규칙과 법을 정하는 사람은 그녀가 될 것이다. 이는 불변의 진실이다. 신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분을 추스른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신강욱과 노수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가정부들이 아침을 준비하고 청소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신지수를 보자 가정부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허리를 살짝 굽혀 공손하게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신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나이가 비교적 젊은 가정부 한 명이 입을 삐쭉이며 눈을 흘기더니 경멸이 담긴 말투로 비꼬았다. “흥,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려고 하다니, 본인 주제도 모르고!” 비록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별장이 유난히 조용했기에 신지수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신지수는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납득이 안 돼? 그런데 뭐 어쩌겠어?” 여자는 말문이 막힌 나머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설령 불만이 있더라도 그녀가 부잣집 딸인 건 사실이지 않은가? 이때,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김영자가 인기척을 듣고 후다닥 뛰어 나와 연신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제 조카 정아라고 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철이 없어요. 이따가 따끔하게 혼낼 테니까 제발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신지수는 고작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기분이 상할 리 없었다. 게다가 정아라는 가정부는 신윤아의 사람인지라 전생에 그녀를 도와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함하는 악랄한 짓거리를 꽤 많이 했다. 물론 아직은 쓸모가 있기에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신지수가 집을 나서자 정아는 화가 나서 발만 동동 구르며 씩씩거렸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주제에 진짜 재벌 집 자제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젠장!” “닥쳐!” 김영자가 굳은 얼굴로 조카에게 호통쳤다. “네 신분이나 잊지 마. 넌 고작 일개 가정부에 불과해. 다음에 주인집 아가씨한테 또다시 말실수라도 한다면 나도 지켜줄 방법이 없어.” “전 단지 윤아 아가씨 대신 한마디 했을 뿐이에요. 그동안 금지옥엽으로 자라셨는데 시골에서 올라온 계집애한테 모든 걸 양보해주는 게 납득이 안 되잖아요.” 정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대체 사모님과 사장님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영자가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넌 그냥 가정부일 뿐이야. 이곳에 1년 반 동안 일했다고 해서 자기 집이라고 착각하지 마. 그럴 자격은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하기 싫으면 당장 나가! 괜히 나까지 연루시키지 말고.” 김영자는 싸늘한 얼굴로 다시 주방에 돌아갔다. 하지만 생각을 곱씹을수록 당시 천방지축인 조카를 신씨 가문에 취업시킨 일이 후회되었다. 이제 어떡하냐는 말이다.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성질만 더러워 감히 주인집 집안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정도라니.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정아는 입을 삐쭉이더니 고모의 경고 따위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불만이 점점 더 커졌다. 신윤아가 그녀를 얼마나 잘 대해주는데, 지난번에 값비싼 스킨케어 세트를 선물하면서 친구라고 말한 적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친구로서 당연히 발 벗고 나서 신지수라는 외부인을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흥! 두고 봐.’ ... 별장이 워낙 커서 신지수는 멀리 가지 못했다. 결국 골프장 밖을 몇 바퀴 뛰면서 1시간 넘게 운동한 다음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어느새 사람들이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고, 이내 소파에 앉아 최신 신문을 읽고 있는 신강욱과 통화 중인 노수정이 보였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통화 상대는 아들 신시후인 듯싶었고, 휴대폰으로 언제 귀국하냐고 물었다. 그러나 신시후는 단지 바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고, 결국 노수정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남편을 노려보았다. “아들은 당신을 닮은 게 분명해. 맨날 일에 치여 정작 가족은 관심도 없고.” 신강욱은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옆에 있는 신윤아가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아빠, 엄마에게 귀를 꼬집히기 전에 순순히 잘못을 인정해요.” 화기애애한 가족 분위기 덕분에 곳곳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입구에 서 있는 신지수는 전생에 신씨 가문에 돌아오자마자 매일같이 이런 장면이 연출된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만 해도 부러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가 어울려 보려고 했으나 웃음소리가 삽시간에 그쳤다. 고립된 느낌은 마치 보이지 않은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항상 그녀를 외톨이로 만들어 주었다. 신지수는 심호흡하더니 일부러 인기척을 내면서 별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듯 고요했고, 웃음소리도 멈추었다. 신강욱은 헛기침하며 신문을 치웠다. 노수정이 서둘러 달려와 그녀를 반겨주었다. “지수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어젯밤에 잘 잤어?” “그럼요.” 신지수가 대답했다. “다행이구나. 얼른 아침 먹으러 가자.” 노수정은 말을 이어가면서 가정부에게 음식을 내오라고 부탁했다. 아침은 푸짐했고, 보신탕과 죽 그리고 맛있는 반찬과 찐빵이 있었다. 신강욱은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회사로 급히 출근했기에 식탁에는 세 모녀만 남았다. 노수정은 신지수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 “지수야, 아침 먹고 나서 엄마랑 쇼핑하러 가자. 그리고 맘에 드는 액세서리도 있으면 다 사줄게.” 일요일 연회는 바로 모레였고, 스케일이 큰 만큼 강성시에서 한자리하는 사람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신윤아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손을 번쩍 들었다. “엄마, 나도 갈래요.” “그래, 쇼핑할 때 널 빼놓으면 섭섭하지. 이 껌딱지야.” 신윤아를 흘겨보는 노수정의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신지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일이 있어서 못 가요.” “네가 무슨 일 있어? 아직 개학도 안 했잖아.” 노수정이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신지수가 벌떡 일어서더니 한 마디 던졌다. “전 배가 불러서 먼저 일어날게요. 맛있게 드세요.” 그러고 나서 뒤돌아서 별장을 나섰다. 노수정은 초조한 나머지 운전기사에게 빨리 따라가라고 지시했다. 이때, 정아가 밖에서 뛰어 들어오더니 의기양양한 얼굴로 신지수를 흘긋 쳐다보고 큰소리로 통보했다. “사모님, 아가씨, 육서진 도련님이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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