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신강욱은 상류층에서 와이프를 사랑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노수정이 내린 결정이라면 항상 불평불만 없이 지지해주었다. 따라서 아까 100억짜리 수표를 결재할 때 찍소리 안 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하물며 친딸의 신분을 공개한다는데 반대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
신강욱의 대답에 신윤아는 초조한 나머지 안색이 돌변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한마디 더 했다가는 되레 부모님의 반감만 일으킬 뿐 더는 만회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신지수의 정체가 공개되는 순간 그녀가 가짜 딸이라는 신상이 만천하에 공개될 텐데...
결국 모든 사람이 자신의 친부모가 사실 망나니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신윤아는 주먹을 꽉 쥐고 증오와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신지수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흔쾌히 따라가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보니 계략에 불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신지수는 고개를 돌렸고, 신윤아의 눈에 독기가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곧바로 초승달처럼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러고 나서 다시 순진무구한 천사 같은 모습으로 일관했다.
“언니, 다행이야. 앞으로 우린 가족이네?”
신지수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니까, 다행이군.”
우는 아이 젖 준다고, 사실 이는 신윤아에게 배운 수법이었다.
전생에 그녀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부모님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받으려고 얼마나 비굴했는지 모른다. 결국 고작 수양딸 신세로 신씨 가문에 남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한발 물러나 적절한 타이밍에 눈물까지 보이며 애초에 본인이 누려야 할 권리를 쟁취했다.
어쩌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표본이 따로 없다.
이내 크게 하품하며 말했다.
“슬슬 피곤하네요.”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늦었고, 노수정이 서둘러 대답했다.
“어머? 벌써 12시가 다 되네. 자, 2층에 올라가서 방 구경시켜줄게.”
신강욱은 싱글벙글 웃으며 직접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2층에 도착하자 남편이 채광과 전망이 좋은 객실에 신지수를 묵게 할 줄 알았던 노수정의 예상과 달리 신윤아의 침실 입구 앞에 멈춰 섰다.
내부는 새 단장을 한 게 분명했고, 원래 신윤아가 썼던 물건은 싹 다 치우고 가구 배치도 바뀌었다.
노수정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엄마, 내가 먼저 제안했어요. 언니의 신분으로 오랫동안 딸 노릇을 했는데 이제 진짜 주인공이 돌아왔으니 양보하는 게 당연하죠.”
혀를 살짝 내밀며 말하는 신윤아의 모습은 순수하면서 장난기가 넘쳤고, 이내 농담까지 던졌다.
“집에서 쫓겨나지만 않는다면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죠.”
이 말을 들은 노수정은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이 바보야. 집에 널린 게 방인데, 굳이 양보해서 속상할 필요 있어?”
“아니에요. 내 방이 제일 좋으니까 당연히 언니가 써야죠.”
활짝 웃는 신윤아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따로 없다.
“게다가 날 사랑해주는 엄마가 있는데 왜 속이 상해요?”
누구는 걱정해주고, 누구는 엄마의 사랑을 받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신지수는 마치 본인이 방을 빼앗아 간 악당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내 모녀의 감동적인 순간을 와장창 깨뜨리며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
“싫으면서 굳이 왜 양보했대?”
고작 착하고 배려 넘치는 캐릭터 설정을 유지하기 위해?
신윤아는 서둘러 해명했다.
“아니야. 내가 기꺼이 바꿔준다고 했어. 언니만 괜찮다면 난 뭐든 내어줄 수 있어. 진심이야!”
“그래? 고마워.”
신지수도 사양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뒤돌아서 세 식구를 향해 말했다.
“전 이만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제집 안방처럼 자연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신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바로 승낙하다니? 적어도 사양하는 시늉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멘트를 열심히 준비하면 뭐 하나?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
그녀에게 신지수가 사양하기만 하면 방을 지켜내면서 심기까지 건드리고, 마지막으로 너그럽고 철든 이미지까지 부각하는 묘수가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점점 어두워지는 신윤아의 얼굴을 보며 신지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의혹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응? 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설마 양보하기 싫은 거야?”
만약 이 시점에서 싫다고 하면 착한 딸 설정도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아니라고 대답하는 순간 앞으로 이를 빌미로 불만을 표출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본인이 ‘기꺼이’ 양보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제 꾀에 넘어간 신윤아는 미소를 억지로 쥐어짜 내며 대답했다.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있나? 피곤할 테니 얼른 자. 안녕!”
신지수는 싱긋 웃더니 노수정과 신강욱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문을 닫았다.
방은 나름 정성스럽게 꾸민 듯싶었고, 침구류도 전부 새것으로 교체해서 접힌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신윤아의 물건은 싹 다 치워진 상태였으며 유일하게 남은 단 한 가지, 바로 일부러 올려놓은 탁자 위의 가족사진 한 장뿐이었다.
가족사진에는 4명의 모습이 보였다. 신강욱과 노수정이 가운데, 왼쪽에는 활짝 웃고 있는 신윤아, 오른쪽에는 무표정한 신시후였다.
다름 아닌 그녀의 친오빠이다.
신시후는 일 때문에 외국에 머물러 집에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전생에도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친하지 않은데다 누구에게나 냉담했던 사람인지라 마주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는 자신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보여주기 위해 신윤아가 일부러 두고 간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해서 외부인은 그녀라는 뜻이었다.
이보다 간단한 방법을 없을 것이며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전생에 이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집도 아닌 곳이라 조만간 떠날 생각이다.
신지수는 사진을 제자리에 두고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주위를 깨끗이 치운 뒤 양반다리하고 눈을 감더니 서서히 명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치 머릿속에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빼곡한 고대 문자들이 사면팔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만약 고대 문자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미 오래전에 멸종된 고대 의학 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것이다. 이는 무려 모든 한의학 대가들을 흥분하게 만들며, 또한 손에 넣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게 하지 않는 보물과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