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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신지수는 죽었다. 게다가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한쪽 눈이 멀었는데 인과응보라고 속 시원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녀의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약혼자 육서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중에 마치 미친 사람처럼 혹한을 뚫고 그녀의 시신을 찾아 헤매더니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 신지수의 영혼은 육체를 떠난 후 예상외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불빛이 훤한 신씨 별장에서 조명을 받으며 감미로운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신윤아와 함박웃음이 가득한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화기애애한 세 식구가 따로 없다. 연주가 끝나자 별장의 유선 전화가 울리고 그들은 신지수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노수정은 잠깐의 침묵을 끝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쌤통이네. 죽을 거면 혼자 조용히 죽지, 연락은 왜 한대?” 신강욱은 의아한 얼굴로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장난도 정도껏 해라고 신지수에게 전해. 고작 이런 수법으로 관심을 끌려고 하다니? 욕만 나오고 우리 가문의 체면만 구겨질 뿐이야.” 신윤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엄마, 언니 탓하지 마세요. 이게 다 제 잘못이에요. 가짜인 제가 언니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더라면 언니도 질투에 눈이 멀어 실수를 거듭하는 일이 없었을 텐데...”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신지수는 벌을 받아 마땅해.” 이내 다정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고,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의 남자가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서진 오빠.” 신윤아는 벌떡 일어서더니 쏜살같이 뛰어가 그의 품에 안겼다. 목소리의 출처는 다름 아닌 육서진, 즉 신지수의 약혼자였다. 온 가족이 다 모인 눈물겨운 상봉의 현장이지 않은가? 신지수는 미소를 짓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세 사람이 신윤아를 둘러싼 채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고 챙겨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웃다 보니 어느새 눈에 피눈물이 맺혔다. 18살이 되는 해, 그녀는 신강욱 부부를 만나 그제야 자신이 부잣집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지만 노수정이 울먹이며 드디어 내 딸을 찾았다는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신지수는 신강욱, 노수정 부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씨 가문에는 그녀를 대신한 가짜 딸이 이미 있었고, 바로 공주님처럼 뭇사람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신윤아였다. 결국 신지수는 양딸이라는 신분으로 서열 2위가 되었다. 물론 그녀에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더욱 소중한 만큼 부모님에게 잘 보이려고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비위를 맞춰주기 바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신윤아의 애교 한 방이면 무용지물과 마찬가지였다. 항상 불안감에 시달리는 신윤아를 보고 신강욱, 노수정 부부가 말했다. “윤아는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야. 네가 나타난 이후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윤아가 덜 스트레스 받게 괜히 앞에서 얼쩡거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심지어 약혼자라는 남자마저 도도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넌 이미 윤아의 모든 걸 빼앗아 갔는데 조금 양보하면 어디가 덧나냐?” 신윤아의 친구들은 조소를 금치 못했다. “적어도 제 주제는 알아야 하지. 촌뜨기 따위가 윤아의 발끝에도 못 미치면서 감히 신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노려? 웃기고 있네!” 모두가 신윤아의 편이며, 그녀가 귀한 부잣집 딸이라고 할 때 신지수는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초라하고 비천한 쥐새끼 같았다. 물론 경쟁할 마음도, 자격도 없다. 매번 자존심을 버리고 불필요한 다툼을 최소화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상처받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났다. 4년 전 생일날, 신지수는 신윤아에게 속아 섬에 가게 되었다. 그러다 신윤아가 바다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신강욱 부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사람을 총동원해 7일 밤낮을 인양했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결국 신윤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범인을 신지수로 지목했다. 신강욱과 노수정은 노발대발하며 관계를 끊었을뿐더러 육서진이 신지수를 감옥에 보내는 것을 묵인까지 했다. ‘잘 있어’라는 한 마디를 끝으로 무려 4년 동안 옥살이하면서 온갖 고생을 겪다가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한쪽 눈을 실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출소하는 날, 길거리 대형 스크린에서 애정행각을 펼치는 신윤아와 육서진을 보고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소형 트럭이 쏜살같이 다가와 그대로 들이받았다. 몸은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세게 부딪혔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극심한 통증은 신경을 마비시켰고, 싸늘한 땅바닥에 누워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속으로 ‘왜’라는 말만 되뇌었다. 신윤아는 분명 살아 있는데 왜 이렇게 매정하고 잔인하게 그녀를 대했단 말이지? 그러나 목숨이 다하는 순간 두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고, 목구멍에서 헉헉대는 소리만 났을 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인과응보’란 말인가? 이미 영혼으로 변한 신지수는 지난날을 회상해보았다. 죽은 사람은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고통과 분노가 물밀듯이 밀려와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더니 영혼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싶었다. “악!” 이렇게 잔인할 수가! 죽은 후에도 신윤아를 무조건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자신의 죽음에 쾌재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니. 신지수의 눈이 점점 빨개졌고, 마음속은 증오와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차올랐다. 순간, 영혼으로 변한 사실조차 망각한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순진무구로 위장한 신윤아의 가식적인 가면을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움직이려는 순간 자신을 끌어당기는 무시무시한 흡입력 때문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지수는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하느님도 어쩌면 이렇게 무심할 수 있지? 결국 조용히 흐느끼며 속으로 맹세했다.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소위 혈육 간의 정이라는 것에 눈이 멀어 애먼 사람한테 마음을 다해 업신여김당하는 일이 없으리라! 이내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혼돈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귓가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신지수, 신지수!”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머리 위로 눈부신 샹들리에가 보였고, 눈앞에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나는 호텔의 새하얀 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가 있었다. 이 장면은... 신지수는 어리둥절했다. 4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석방되던 날, 시신을 수습할 사람도 없이 황야에 버려진 채 죽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손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에 거울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거울 속에는 검은색 긴 생머리에 뽀얀 피부,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소녀가 서 있었다. 무려 그녀의 18살 때 모습이지 않은가? 심지어 살아 움직이는 진짜 사람이다. 신지수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역시 하느님은 공평했다. 18살로 다시 태어나게 할 줄이야! 몸에는 감옥에서 생긴 끔찍한 흉터가 없으며, 눈도 멀쩡하고 다리도 두 개였다. 신지수는 울다가 웃더니 기쁨을 만끽하고 나서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증오가 어느새 불길로 변해 활활 타올랐다. 전생에서 그토록 간절했지만 결국 얻지 못한 가족 간의 정 때문에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시신을 수습해줄 사람도 없이 비참하고 처량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니 더는 도마 위의 생선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신지수는 눈물을 닦아냈다. 심연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숨어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를 연상케 했고, 그동안의 순수함은 사라진지 오래되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잔혹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들고 굳게 닫힌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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