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이는 태어나서 처음 당해보는 굴욕이었다.
“어쨌든 결혼은 꿈도 꾸지 마세요. 동의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래.”
육상철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심코 말했다.
“과연 네 의견이 중요할까?”
육서진은 말문이 막혔다.
현재 가문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할아버지로서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아무도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할아버지...”
육서진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신지수의 어디가 마음에 드신 거죠? 그나마 반반한 얼굴을 제외하고 내 약혼녀가 될 자격은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는데...”
육상철은 손자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못을 박했다.
“자격은 내가 알아서 판단해. 너희들이 거절한다고 해서 취소될 혼사가 아니야. 너나 심씨 집안 그 계집애나 마찬가지니까.”
이내 콧방귀를 뀌고 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자리를 떠났다.
육서진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튀어 올랐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딱히 화풀이할 곳이 없었다. 어쨌거나 할아버지의 말은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신지수가 순순히 포기하게 할 방법은 있기 마련이다.
그는 냉소를 짓더니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신지수를 조사해 본 다음 학교에 소문을 싹 다 퍼뜨려. 과연 무슨 배짱으로 얼굴 들고 다닐지 지켜볼 거야.”
...
연회가 끝나고 신윤아는 방에 틀어박혀 단식 투쟁했는데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다.
결국 노수정은 육상철의 결혼 요구에 절대 동의하지 않겠다고 거듭 맹세했으며, 설령 혼인을 올리더라도 상대는 신지수가 아닌 그녀일 거라고 했다.
이 말을 듣자 신윤아는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엄마, 진짜예요? 설마 거짓말은 아니죠?”
“당연하지.”
“하지만... 어르신께서 싫다고 하면 어떡하죠?”
“걱정하지 마. 아빠랑 엄마가 있잖니? 어르신과 협의해 볼 거야.”
노수정은 신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너랑 서진이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잖아. 아무도 갈라놓을 수 없으니까 안심해.”
신윤아는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활짝 웃었다.
노수정은 딸의 기분을 잘 달래주고 방을 나섰다.
정아가 쟁반을 들고 와서 신윤아의 시중을 들며 씩씩거렸다.
“신지수는 정말 뻔뻔하네요. 어떻게 남의 약혼자까지 빼앗으려고 하죠? 이런 사람이 아직 살아 있으니까 신씨 가문이 아수라장이 되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신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긴, 신지수가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지금도 신씨 가문의 유일한 공주로서 육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는 건 물론 육서진도 빼앗기는 일도 없을 텐데...
다만 신지수를 완벽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직접 나서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만 했다.
신윤아는 미소를 살짝 지으며 대신 분풀이해주고 있는 정아를 향해 말했다.
“지성 오빠한테 연락해서 내가 아프다고 해.”
지씨 가문 막내 도련님 지성은 신윤아라면 간도 쓸개도 빼줄 수 있는 남자였다.
어제 연회에서 그녀가 울면서 뛰쳐나간 다음 가장 먼저 뒤를 쫓은 사람이 바로 지성이었다.
정작 신윤아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짝사랑 남도 가끔은 쓸모가 있는 법,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주는 장점이 존재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지성은 부리나케 신씨 별장으로 달려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신윤아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유난히 가련하고 불쌍하게 느꼈다.
지성은 초조한 나머지 서둘러 물었다.
“윤아야, 병원 다녀왔어? 약은 먹었니? 아픈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프구나.”
신윤아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성 오빠가 웬일이에요?”
“네가 아프다고 들었어.”
그는 신윤아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이내 연회 때문에 아프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윤아야,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네.”
신윤아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마음고생 하겠어요. 단지 진짜 딸인 척 연기한 가짜일 뿐인데...”
“아니야! 감히 널 가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 넌 내 마음속의 영원한 공주님이야.”
지성은 심장이라도 꺼내서 보여줄 기세였고,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신윤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굳이 위로해주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저한테 평생 넘을 수 없는 산이죠. 신지수가 살아 있는 한 난 가짜에 불과할 테니까.”
지성도 바보가 아닌지라 곧바로 눈치챘다.
“그게 뭐 어렵나? 신지수라는 사람이 눈에 거슬려?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면 그만이야. 내가 대신 복수해줄 테니까 나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