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소윤정은 나중에야 최성훈의 할아버지가 최성훈과 강수아의 사이를 반대하며 죽음으로 압박해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당시 바닷가를 찾은 이유는 심장병이 있는 그가 강수아를 떠나서는 인생이 의미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좋지 않아 할아버지로 인해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고 그의 인생은 희망과 목표를 잃고 암담함만 남게 되었다.
때마침 그때 그는 바다에 뛰어든 소윤정을 만났다.
강수아를 닮은 가녀린 뒷모습을 지닌 여자가 바다로 뛰어든 모습을 보고 최성훈은 강수아를 보는 듯해 생각도 하지 않고 따라 뛰어내렸다.
그날부터 최성훈은 그녀를 강수아의 대역으로 삼았다.
강수아라는 세 글자는 마치 주문처럼 그녀를 속박했다.
꿈속에서도 강수아는 그녀를 놓지 않고 웃는 얼굴을 한 채 독한 말을 내뱉었다.
“소윤정, 당신은 평생 나의 대역일 뿐이야! 평생!”
가슴이 찢기듯 아파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소윤정은 식은땀이 흥건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등을 켜자 옆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니 이부자리에는 온기가 없이 차갑기만 했다.
‘최성훈은 오늘 강수아와 함께 있을 테니 안 오겠지?’
사람의 마음은 모두 살에서부터 난 것이었다.
최성훈이 그녀와 하준을 받아들인 날부터 그녀는 자신을 최성훈 부인의 역할에 대입하여 전업주부가 되었다.
지금 강수아가 돌아오자 현실은 또 달라졌다.
창밖의 칠흑 같은 어둠과 비바람을 바라보며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상황을 똑똑히 인지했다. 최씨 가문의 사모님이 아니라 그녀는 그저 크리스털 신을 신은 신데렐라였고 자정 12시가 넘으면 꿈에서 깨어나야 할 사람이었다.
최성훈을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놓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 현실이 달갑지 않았고 그녀는 아직 그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최성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음이 두 번 울리자마자 전화가 끊기며 이어 문자 메시지가 왔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해.]
한 번도 문자를 보내지 않았던 최성훈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내용도 의미심장했다.
‘좋은 일을 망치지 말고 자발적으로 아내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을 암시하는 건가?’
소윤정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문자 메시지를 3분 동안이나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그 후, 그녀는 최성훈과 그의 첫사랑을 인정해 주기로 결심했다.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저녁, 최성훈은 직접 운전하여 강수아를 묵는 곳까지 바래다주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가운데 남자가 우산을 펼치고 코트를 벗어 아름다운 여인을 감쌌다. 그는 강수아를 따라 그녀의 집 문밖까지 향했다.
남자의 어깨는 흠뻑 젖어있었지만 강수아 몸에는 비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남자의 흠뻑 젖은 몸을 보며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성훈 씨, 옷이 너무 많이 젖었어. 얼른 들어와. 감기 걸리겠다.”
최성훈은 거절하지 않고 검정 우산을 접어 사용인에게 건네며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사용인은 강수아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가씨, 돌아오셨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오랜 시간 동안 줄곧 비어 있었는데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요. 저는 최 대표님이 저를 해고할 줄 알았는데 해고하기는커녕 저를 여기 머물게 하며 이곳을 원래대로 유지하며 아가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아가씨, 최근 5년 동안 대표님께서는 잘 지내지 못하셨어요. 대표님께서도 어쩔 수 없었으니 화내지 마세요. 소씨 가문 그 여자가 너무 막 나가지만 않았어도 대표님께서 결혼할 일은 없었을 거예요.”
최성훈은 뒤에서 실내 장식을 둘러보며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5년 전과 변함이 없었는데 여전히 강수아가 떠나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강수아는 익숙한 환경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최성훈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성훈 씨, 미안해. 할아버지가 협박한다고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끝까지 함께 해야 했는데 정말 후회돼.”
그녀는 발끝을 세우고 남자의 목에 팔을 둘러 더 높이 갈 수 있도록, 그의 어깨와 비슷한 높이에 이르러 그의 입에 입을 맞추도록 노력했다.
여자의 입술은 부드럽고 은은한 장미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청순 무결한 모습으로 눈을 깜빡였는데 마치 숲속에서 길을 잃은 요정처럼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남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부드러운 몸을 가진 첫사랑이 그에게 입을 맞추는 사실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었어야 했다.
강수아와 연애할 때 최성훈은 이런 장면을 수없이 상상했다.
하지만 정말 강수아가 그에게 입을 맞췄을 때야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흥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심장이 뛰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단순히 살과 살이 닿은 느낌일 뿐, 아무런 설렘도 느껴지지 않았다.
최성훈이 강수아를 밀어내려고 할 때, 그녀는 이미 먼저 몸을 빼고 얼굴을 가린 채 부끄러워하며 2층으로 달려갔다.
2층 모퉁이를 돌면서 그녀는 사용인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아줌마, 성훈 씨에게 목욕물 좀 받아주고 깨끗한 옷 한 벌만 가져다주세요. 옷이 다 젖었어요.”
그녀는 말을 남기고 쑥스러워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최성훈은 1층에 서서 아름다운 그녀가 도망가는 것을 보며 눈가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눈앞에 떠오른 것은 뜻밖에도 비를 머금은 듯한 청초한 얼굴을 가진 소윤정이었다.
장은실이 다가와 그를 공손히 2층으로 안내했다.
“도련님, 저를 따라오세요. 목욕물은 다 받아두었으니 젖은 옷은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셔츠 단추를 풀며 화장실로 들어가 더러운 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강수아는 이내 최성훈의 옷을 안고 있는 장은실의 앞으로 왔다.
최성훈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들은 후, 그녀는 잠금을 풀어 소윤정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 받지 않고 메시지를 남기고 흔적을 지웠다.
모든 것을 한 후, 강수아는 장은실에게 눈치를 주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최성훈이 나왔을 때 장은실은 여전히 화장실 문밖에 서서 그의 더러운 옷을 껴안고 있었다.
남자는 핸드폰을 건네받고 머리를 닦으며 1층으로 향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멎었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졌다.
최씨 별장을 떠난 후, 소윤정은 하준을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갈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친한 친구 백은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백은지는 그녀와 최성훈의 이혼 소식을 듣고 비명을 질렀다.
“윤정아, 정말 최성훈이랑 이혼하게? 이거 인터넷에 올려도 돼? 완전 실검 1위는 따놓은 뉴스야!”
소윤정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이혼 서류에 사인했는데 성훈 씨는 아직 안 했어.”
최성훈과 결혼한 후부터 그녀는 두문불출하며 가정주부 생활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강수아가 최성훈의 첫사랑이고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만 알고 소윤정이 부인인 줄은 몰랐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혼인도 5년이나 유지됐는데 이것도 소윤정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지?”
백은지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최성훈이 왜 마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