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우리 둘 사이에 감정이 없다고?
그와 송여월에 대해?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송여월이 임신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송여월을 향한 염지훈이 태도를 봤을 때 아마도 나와 이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 듯싶었다.
나는 끝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염지훈이 다 낫고 나면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송여월이 서러워할 일 없게 명분을 주려고 안달일 줄은 몰랐다.
잠시 침묵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혼에 대해 나는 딱히 의견 없어. 어차피 우리 둘 사이엔 딱히 감정이 없었잖아. 하지만 그래도 부부였는데, 나에게 시간을 좀 줬으면 해. 아버지가 아파, 당신도 알잖아. 이런 때에 우리가 이혼한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못 받아들이실 거야. 그러니까, 염 대표. 이혼 수속은 며칠 미뤘다가 해도 될까? 그리고 당신과 내가 이혼하면 두 가문의 일마저 엮이게 될 거고, 그 속의 이해득실은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거야.”
나는 도무지 그의 기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염지훈의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차갑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방 안의 기온마저도 떨어진 듯해 몸이 덜덜 떨렸다.
입술을 꾹 다문 염지훈의 두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한참이 되어서야 염지훈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그는 코웃음을 치며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송여은, 나 지금 눈치껏 빠져준다는 거에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염지훈이 왜 화를 내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송여월과 하루라도 빨리 같이 있고 싶은 거면 당장 청산각에서 나갈게. 두 사람 방해하지 않게.”
“나가!”
별안간 버럭한 염지훈은 마치 날뛰는 짐승처럼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그런 염지훈에 나는 깜짝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조금 멍해진 나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내는 삼킬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이 이야기는 물 건너간 듯싶었다.
병원을 나선 나는 순간 무력감에 휩싸였다. 이제 서둘러 부모님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던져놔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이혼으로 일이 커진다면 두 가문 모두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했다.
그 후로 며칠간 나는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첫째로 아버지가 입원하고 있는 탓에 송한 그룹 쪽에 일이 쌓여 있었다. 비록 송한 그룹의 관리자는 아니었지만 뭐가 됐든 송씨 가문의 딸이기도 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기면 높고 낮은 직위의 사람들이 전부 나를 찾아왔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바빠지게 된 것이다.
둘째로, 염지훈도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여월이 옆에 있어줄 테니 내가 찾아가는 건 너무 쓸데없는 일이었다.
주말 오후, 회사 일을 처리하고 난 뒤 나는 곧바로 청산각으로 돌아갔다. 일주일 내내 바삐 돌아친 탓에 조금 쉬고 싶었다.
그러나 별장 밖에서 예기치 못하게 진한일을 마주하게 됐다.
나를 보자 진한일은 조금 어색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오늘 퇴원하시는 데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순간 멈칫했던 그날 병원에서 염지훈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두 사람을 위해 당장 청산각을 비워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요 며칠 일이 너무 많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탓에 깜빡하고 말았다.
진한일의 귀띔에 나는 그제야 떠올랐다. 염지훈은 아마 그와 송여월이 돌아왔을 때 서로 마주쳐서 어색해지지 않게 미리 짐을 빼라고 귀띔하라고 진한일을 보낸듯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진한일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염 대표에게 전해줘요. 송여월과 염 대표 방해 안 할 거라고요. 짐들은 이미 다 정리했어요.
진한일은 조금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네?”
나는 그저 웃음만 지어 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아 딱히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나는 간단한 인사만 건넨 뒤 집으로 들어갔다.
내 물건은 원래 많은 편도 아니었다. 대부분이 옷과 액세서리라 정리를 마친 나는 캐리어를 끌고 전지안의 아파트로 향했다. 비록 송씨 가문의 딸이긴 했지만5년 전의 일로 아버지와 나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따로 지낼 부동산도 없었다.
송씨 가문 본가는 당연히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갔다간 분명 어떻게 된 건지 따져 물을 테니 일단은 전지안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염지훈과 내가 이혼하려한다는 말을듣자 전지안의 얼굴은 조금 과할 정도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송여월은 임신했고 염지훈은 너와 이혼하겠다고 하고 널 쫓아냈다고? 송여은, 넌 내가 본 재벌 딸 중에 제일 처지가 불쌍한 사람이야, 진짜로!”
나는 조금 짜증이 일었다.
“쫓겨난 건 아니야. 난 내 주제를 잘 알아. 원래 염지훈은 날 사랑하지 않았고 이제 좋아하는 사람이 돌아온 데다 임신까지 했으니 자리 비워주는 것도 당연한 거지.”
전지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에 조금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라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