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오늘 읍내에 가서 엄마 아빠 주려고 샀어요. 지금 쓰는 구형 폰은 버리고 새로 구매한 스마트폰으로 바꾸세요. 그리고 이건 옷이랑 신발인데 얼른 입어봐요.”
“스마트폰? 비싸지 않아?”
하정욱은 톱을 내려놓고 손을 닦았다.
마을 사람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사용했고 동영상 기능도 지원이 되어 종종 옆에서 같이 보곤 했다.
다들 명절 때 자식들이 바꿔줬다고 자랑했는데 이제 남 부럽지 않았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어떻게 쓰는 거야?”
이내 포장을 뜯으면서 사용법에 관해 물었다.
“손정호가 잘 아니까 가서 물어봐야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뛰어갔다.
“아니, 코앞에 있는 딸한테 물어보면 될걸...”
하선아는 기쁜 얼굴로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아빠는 손정호한테 자랑하러 간 거야.”
설날에 스마트폰으로 바꾼 이후 시도 때도 없이 들고 다니는 손정호 때문에 동네 어르신은 은근히 부러워했다.
하선아는 새로 산 옷과 신발을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건 아직 입어보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돌아오면 다시 얘기해. 선아야, 일단 닭 모이 좀 줄래? 엄마라도 입어보고 올게. 천이 정말 부드럽구나.”
양윤경은 손에 든 옷을 만지며 말했다.
엄마는 피팅하러 안방으로 들어가고, 아빠는 스마트폰을 자랑하러 집을 비웠으니 닭 모이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무럭무럭 자라거라. 나중에 통닭으로 만들어서 금이랑 바꿔야지.”
하선아는 오동통한 병아리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무려 살아 움직이는 돈이지 않은가?
그녀가 부모님의 물건을 사줬다는 소식이 외출 중인 이현숙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큰아들을 만나고 오던 길에 손녀딸이 짐을 한 보따리 안고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집으로 향했다.
때마침 새 옷과 신발로 단장한 양윤경을 마주쳤다.
“딸, 옷이 너무 예뻐. 신발도 바닥이 폭신해서 좋은데? 이렇게 발이 편한 신발은 처음 신어 봐.”
양윤경이 신이 나서 말했다.
평소에 그녀는 시장에서 산 만 원짜리 싸구려를 신고 다녔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엄마를 보자 하선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꼭 부모님께 효도하기로 마음먹었다.
“흥!”
이현숙은 콧방귀를 뀌며 인기척을 냈다.
“그렇게 입고 밭일을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엄마한테 사드린 건데 어련히 알아서 하겠죠.”
하선아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는 엄마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허구한 날 독설만 퍼부었다.
이현숙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딱 봐도 비싼 옷을 심지어 세트로 장만하다니!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더욱 짜증이 났다.
“스마트폰도 사줬다며? 네 엄마는 학교를 안 다녀서 글도 읽을 줄 몰라. 차라리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사촌 동생한테 줘.”
“걔가 고등학생이 되었든 말든 우리 엄마랑 무슨 상관이죠? 자기도 갖고 싶으면 큰아버지한테 사달라고 하면 되지, 엄마한테 드린 물건은 아무도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
하선아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그동안 차마 반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배짱이 두둑했다.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몇 년 뒤면 너도 시집갈 텐데 집안에 대소사를 결정할 사람조차 없으면 어떡하니?”
이현숙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때가 되면 제가 죽기라도 하나요?”
하선아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아무리 그래도 네 사촌 동생인데 누나로서 선물 정도는 줄 수 있잖아.”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분위기에 양윤경이 서둘러 나서서 중재했다. 괜히 나중에 이현숙이 밖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딸의 이미지라도 나빠지면 큰일이었다.
“어차피 내 돈 내 산이에요. 누구한테 주든 할머니 알 바 아니죠.”
띠링.
이때, 하선아의 휴대폰이 울렸고 배달 물품이 도착했다.
그녀는 서둘러 받으러 나갔고 곧이어 커다란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또 뭘 사느라 돈을 쓴 거야? 어쩌면 오자마자 이렇게 낭비가 심한지.”
이현숙은 질투심에 휩싸였다.
자기만 쏙 빼놓고 전부 새단장하다니! 정녕 수선해서 입은 옷과 낡아빠진 신발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단 말인가?
“엄마, 이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옷이에요.”
하선아는 컴퓨터를 안고 침실로 올라가는 길에 양윤경을 향해 말했다.
“알았어! 지금 가져다주고 올게. 아마 엄청 기뻐하실 거야.”
옆 동네에 사는 외할머니댁은 스쿠터를 타면 10분이면 도착했다.
이현숙은 텅 빈 마당을 둘러보았다. 본인만 제외하고 전부 선물이 있다니?
“할머니는 워낙 소박하셔서 괜히 돈 낭비한다고 잔소리 들을까 봐 일부러 안 샀어요.”
이현숙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돈 낭비가 아니라 나한테 쓰기 아까운 거겠지!’
게다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까지 챙겨주면서 돈 걱정이 가당키나 한가? 의도적으로 자기만 쏙 빼놓은 손녀딸을 떠올리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
“정호야, 스마트폰 전원을 어떻게 켜?”
하정욱은 새 휴대폰을 들고 손정호를 찾아갔다.
“오? 샀어?”
손정호는 하정욱의 손에 든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최신형으로 보이는 기종은 적어도 백만 원은 넘을 것이다.
반면, 그가 설날에 아들한테 선물 받은 휴대폰은 재작년 모델이라 기껏해야 몇십만 원밖에 안 되었다.
“우리 딸이 사줬어. 필요 없다는데 굳이 바꿔준다고 해서 극구 사양했더니 어찌나 우는 소리 하는지, 그래서 마지못해 가졌어. 엄마 아빠 말은 항상 귓등으로 듣고 돈을 얼마나 헤프게 쓰는지 몰라.”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하정욱의 모습은 전혀 흉을 보는 느낌이 아니었다.
손정호의 안색이 사뭇 어두워졌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랑을 늘어놓는 하정욱을 보자 괜히 심기가 불편해 미소를 쥐어짜 냈다.
“신형은 나도 잘 모르니까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무슨 돈이 있단 말인가? 어쩌면 대출받아서 샀을지도 모른다.
“그래? 집에 가서 말 안 듣는 딸한테 가르쳐달라고 해야겠네.”
하정욱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손정호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이 휴대폰을 바꿔준 덕분에 동네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아 꽤 행복한 나날을 보냈는데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하정욱이 딸한테서 더 좋은 스마트폰을 받게 될 줄이야!
정말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손정호는 하선아가 사준 스마트폰을 들고 동네방네 자랑하며 돌아다녔다.
한편, 양윤경은 물건을 챙겨서 곧바로 스쿠터를 타고 친정으로 부리나케 향했다.
이내 집에 들어서자마자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 선아가 읍내에서 옷을 샀는데 사이즈 맞는지 얼른 입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