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서준수는 잠에서 깬 후 공간 안에 가득 쌓여있는 음식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갖가지 음식 중에 [준수 씨 거예요]라고 표기해놓은 제육 덮밥과 콜라는 하선아가 장기 고객인 그를 위해 특별히 따로 챙겨둔 것이다.
서준수 덕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겼으니 이 정도 챙겨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서준수는 그녀가 따로 챙겨준 제육 덮밥과 콜라를 보며 괜히 심장이 간질간질해졌다.
이정오는 서준수에게서 받은 호빵들을 기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둘 나눠주었다.
사실 하선아의 공간은 아직도 많이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아니면 매일매일 기지 사람들에게 음식을 조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녀가 호빵과 부침개를 많이 넣어두긴 했지만 한 사람이 하나를 온전히 다 먹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반만 먹는 것도 좋은지 허겁지겁 호빵을 먹어치웠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호빵을 입에 문 채로 울기까지 했다.
줄곧 독이 든 나뭇잎만 먹다가 드디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으니 감격할 만도 했다.
“정오야, 분유는 아마 내일이나 모레 받을 수 있을 거야.”
서준수가 말했다.
“아직 몇 팩 남았는데요 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틀이나 굶은 것에 비하면 지금은 꽤 괜찮은 상황이기에 욕심 부릴 이유가 없었다.
이정오는 장혁과 안지호와 함께 맛있게 호빵을 먹다가 서준수가 혼자 제육 덮밥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왜, 왜 대장은 고기가 있어요?”
돼지고기를 먹어본 건 물론이고 본 지도 너무 오래됐던 터라 그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이정오 뒤로 장혁과 안지호도 다가왔다.
“이건 내 밥이야.”
서준수는 아주 담담하게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몰려든 세 사람을 무시한 채 맛있게 식사를 했다.
요 이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서준수의 안색도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준수가 어디에서 음식을 가지고 오는 건지는 모르고 그저 그가 신기한 능력을 각성했다는 것만 알았다.
“와, 고기 냄새 정말 미쳤는데요? 음료수도 엄청 맛있어 보여요.”
안지호가 눈을 반짝이며 서준수의 콜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따 맛 정도는 보게 해줄게.”
서준수는 일단 기지 사람들의 음식 문제를 해결한 뒤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벽을 세우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대피용 지하 벙커밖에 안 되니까.
식사를 마친 후 이정오는 아들인 현이를 보러 갔다. 아이는 분유로 허기를 달래서 그런지 전처럼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네 사람은 오늘 아주 날아다니며 좀비를 죽였다. 이게 모두 든든하게 식사를 한 덕분이었다.
안지호는 한방으로 좀비를 쓰러트리고는 좀비의 뇌에서 수정구슬을 챙겼다.
“여기 마트가 있어요. 그런데... 먹을 만한 게 하나도 없네요.”
안지호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이곳은 기지와 매우 가깝기에 음식 같은 건 진작 없어진 지 오래다.
또한 종말의 시대가 도래한 지 1년이나 되었기에 제대로 된 음식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형님, 저기 은행이 있어요!”
이정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돈은 필요 없어.”
서준수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길을 걸어갔다. 이곳의 돈은 하선아 쪽 세계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형님, 여기 금은방이 있어요!”
이정오가 또다시 흥분하며 맞은편에 있는 금은방을 가리켰다.
그 말에 안지호와 장혁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이상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뭐 하는 거지? 이 시국에 금은방으로 가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텐데. 혹시... 지난번에 형님이 아이들한테 돈 되는 물건을 달라고 했던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가자!”
네 사람은 금은방으로 향했다.
금은방의 문은 깨지지도 않고 아주 멀쩡했다. 내부도 거미줄이 군데군데 쳐져 있을 뿐 마트와 달리 이곳은 그 어떤 침입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서준수는 유리를 부수고 안에 있는 금으로 된 액세서리와 옥 팔찌 같은 것을 전부 다 공간 안에 챙겨 넣었다.
돈 되는 것들을 다 챙긴 후 그는 하선아의 요구대로 곧바로 서점으로 가 공간이 다 찰 때까지 책을 밀어 넣었다.
공간이 다 찼으니 나머지는 내일 다시 가지러 올 수밖에 없다.
물건을 다 챙긴 후 네 사람은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좀비를 몇 마리 더 죽이고 수정구슬을 10개 넘어 확보한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돌아갔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태양이 지면 좀비들은 신체 능력이 강화되고 움직임도 더 민첩해진다. 그래서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저녁에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좀비 몇 마리가 포위해 오는 것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지만 몇백 마리로 늘어나면 그때는 각성자들까지 위험해지니까.
서수진은 기지로 돌아온 후 희미한 불빛에 의존해 안으로 들어갔다.
이 불빛도 밖에서 어렵게 발전기를 구해와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장님...”
그때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그의 팔을 잡았다.
서준수는 그녀가 음식을 요구하려고 온 건 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치 음식은 아까 배분한 것으로 끝입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대뜸 팔에서 옥 팔찌를 빼며 말했다.
“이거 줄 테니까 내일 우리 손주한테 줄 약 좀 구해다 주면 안 될까요?”
서준수는 잘 관리된 옥 팔찌를 건네받았다. 이곳에서는 빵 한 개 값도 되지 않지만 하선아 쪽 세계에서는 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손주가 어떻게 아픈데요?”
서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
“급성장염인 것 같아요.”
그때 안경을 쓴 남자가 다가와 대신 대답했다. 그는 의사였고 종말의 시대가 도래한 뒤로 이곳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병을 진단하고 돌봐줄 뿐 약도 뭣도 없었기에 치료를 해주지는 못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약을 얻어보죠.”
“급성장염에 걸린 사람은 저 할머니 손주 말고도 많아요. 아마 깨끗하지 못한 것을 먹은 탓일 거예요.”
이정오가 말했다.
“일단 내일 다시 얘기해.”
서준수의 말에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서준수와 이정오가 다른 곳으로 떠난 후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였다. 의사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엄마, 이거 먹어요!”
그때 옆에서 웬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몇 입 베어 물지도 않은 호빵을 손에 꽉 쥐고 힘없이 앉아 있는 그녀의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엄마는 괜찮으니까 너 먹어...”
그녀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얼굴이 무척 창백했고 입술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장기간 독소가 들어간 나뭇잎을 먹은 부작용인 것 같았다.
“엄마, 죽지 마세요! 연이는 안 먹어도 돼요! 그러니까 엄마, 이거 먹고 얼른 나아요!”
이제 고작 4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두 모녀가 안타깝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기에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실 이쪽 기지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인 편이었다. 다른 곳은 이성을 잃고 살인까지 했다고 했으니까.
서준수는 공간으로 들어가 하선아의 동태를 확인했다. 물건들이 하나도 옮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자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메모 한 장을 남겨둔 후 다시 나왔다.
다음 날 아침, 하선아는 알림 소리도 듣지 않고 일찍 잠에서 깼다.
요즘 그녀는 잠에서 깨면 무척이나 개운하고 머리가 맑았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긴 것 때문도 있고 수정구슬로 체력이 좋아진 덕분도 있을 것이다.
하선아는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체크했다. 그녀가 자는 사이, 좋아요과 코멘트가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렸다.
6시가 된 후 공간으로 들어간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마터면 눈이 다 멀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