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양지안의 제안은 진태웅의 마음에도 와닿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이따가 사람을 보내 서류를 보내줄게요. 일단 할아버지가 넘어가시도록 먼저 처리하게요.”
양지안의 눈가에는 미소가 어렸지만 그보다는 예의와 감사가 더 많이 묻어났다.
의견이 일치되자 진태웅은 더는 머물지 않았다.
“양지안 씨,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이 근처는 택시 잡기 어려워요. 제가 바깥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두 사람은 차량이 많은 교차로에서 헤어졌다. 진태웅이 택시를 부르려는 순간, 롤스로이스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큰 걸음으로 다가와 진태웅 앞에서 공손히 말했다.
“진태웅 씨, 차에 오르십시오.”
“당신은 오성후 씨인가요?”
진태웅은 불확실한 눈빛으로 물었다.
지난 3년간 그는 오성후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성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분을 확인한 뒤 덧붙였다.
“회장님의 지시로 모시러 왔어요. 계약서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슨 계약서요?”
진태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성후 역시 진태웅의 반응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회장님께서 말씀 안 하셨어요? 현재 진씨 가문의 강주 지역 모든 자산이 진태웅 씨 명의로 이전되었습니다.”
이유를 알게 된 진태웅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아버지다운 일이군.'
그는 가족 사업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강주 지사만 해도 총자산이 십조가 넘는다.
아버지가 이런 조처를 한 건 아마도 자신의 태도를 시험해보기 위한 것일 터였다. 강주에서 시작해 점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게 하려는 속셈이리라.
진태웅은 더 묻지 않고 손을 저었다.
“계약서는 오성후 씨가 갖고 있어요. 강주의 사업은 여전히 오성후 씨가 관리하고요. 변동할 필요 없어요.”
“됐어요. 일단 나한테 거처 하나만 마련해 줘요. 다른 건 내가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고요.”
지난 3년간 그는 모든 에너지를 손윤서에게 쏟아부었지만 결국은 집 한 칸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너무 많은 감정 소모는 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진태웅은 오로지 앞으로의 계획만 생각했다. 손윤서가 빚진 것들을 모두 갚게 만들어야 했다.
“진태웅 씨, 한 가지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진태웅 씨의 허락 없이 대진 그룹과의 협력을 중단했습니다.”
대진 그룹이 이처럼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성후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애초에 손윤서도 진씨 가문의 사람이었기에 오성후는 지시를 받고 늘 최선을 다해 대진 그룹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이 이혼한 것을 알았으니 더는 협력할 필요는 없었다.
오성후의 독단적인 결정에 대해 진태웅은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묵인해주는 태도였다.
“때론 잘못에 대가를 치르는 법이죠.”
두 시간 후, 진태웅은 솔빛아파트에 도착했다. 오성후가 미리 마련해둔 집이었다.
위치도 나쁘지 않았고 2층 구조의 단독 주택으로 살기에 충분했다.
진태웅은 단지 내부의 환경과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거주율도 높고 생활의 정겨움이 느껴졌다.
알아보니 이곳에는 대부분 은퇴한 노년층과 그 가족들이 살고 있어 안전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성후의 도움으로 집은 금방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생활용품도 모두 갖춰지어 바로 입주할 수 있었다.
침실 정리를 마친 진태웅은 샤워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휴대폰을 확인할 시간이 생겼다.
열 통이 넘는 읽지 않은 메시지와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전화는 모두 손수진에게서 온 것이었고 문자도 함께 도착해 있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진태웅이 받은 불공평한 대우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을 토로하며, 오향은과 다툰 끝에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진태웅은 내용을 다 읽고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이제 손씨 가문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손수진의 신분이 너무나 민감했다.
계속해서 내려보니 손윤서에게서도 문자가 하나 와 있었지만 진태웅은 읽어보지도 않았다.
마지막은 할아버지 진영준의 걱정 어린 문자였다.
[착한 손자, 강주의 사업은 이제 네게 맡긴다. 부담 갖지 말거라. 네 아버지한테는 기회가 될 때 내가 직접 말하마. 너 자신을 너무 억누르지 말고 살아라.]
내용은 짧았지만 진태웅은 그 안에서 할아버지의 걱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버지와 다툰 지 3년째, 그는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리며 진태웅은 마음을 정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지나면 꼭 찾아뵐게요.]
휴대폰을 침대 옆에 던져두고 어느새 진태웅은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맞이한 편안하고 달콤한 잠이었다.
하지만 기쁜 사람이 있지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손윤서는 이 밤을 잠들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
다음 날, 창밖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 때, 진태웅은 눈을 뜨자마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침 준비할게. 너는 좀 더 자고...”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는 문득 텅 빈 옆자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습관이라는 건 고치려면 시간이 걸리는군.'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진태웅은 더는 잠을 이어갈 마음이 없어 편안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단지 내로 나섰다.
이미 공원에는 노인들이 하나둘 모여 아침 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진태웅은 한적한 숲속을 찾아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의술과 무술은 원래 한 뿌리로, 산에서 의술을 배우던 진태웅은 동시에 무술을 연마해 실력을 키워왔다.
새벽은 체력을 단련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 이 습관은 수년째 단 한 번도 끊긴 적 없었다.
한 세트의 동작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마지막 동작을 끝내며 진태웅은 천천히 탁한 숨을 내쉬고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몇 년째 끊임없이 연습해온 이 천중신체술은 이미 진태웅에게 익숙했지만, 매번 연습할 때마다 점점 더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만큼의 보상은 있었다. 진태웅의 체질은 점점 더 좋아졌고, 이 천중신체술의 신비로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젊은이, 체력이 아직 부족한 모양이군. 이 정도만 했는데도 온몸에 땀이 흘러내리는 걸 보니.”
옆에서 언제부터인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나타나 진태웅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진태웅이 노인을 올려다보니 여든이 넘은 듯한 나이에도 정기가 충만해 노쇠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노인의 평가에 진태웅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인사만 나누고 자리를 떴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아침을 사 온 후 샤워를 마치고 식사를 시작했다.
문득 이런 여유로운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니까.
웅웅.
아직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양지안의 전화가 걸려왔다.
“결혼 증명서는 이미 지인을 통해 보냈어요. 오늘 저녁 시간 되세요? 집으로 와서 식사나 함께하시죠.”
“그럼 6시로 정합시다. 시간 되면 미리 연락드릴게요.”
연기라 해도 진태웅은 대충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 설명하기도 어려울 테니 말이다.
시간을 정하고 두 사람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각자 할 일이 있다고 흩어졌다.
그리고 진태웅이 할 일은 바로... 낚시였다.
대진 그룹.
손윤서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그녀는 휴대폰에 저장된 익숙한 번호를 바라보며 전화를 걸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 이 순간 그룹에 큰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