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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엄마, 아빠가 날 여기로 보낸 거야. 첫 만남이니 더 정중하게 찾아봬야 한다고 오긴 했는데 워낙 급해서 제대로 준비를 못했네. 미안.” 별장 앞 골목을 새까맣게 메운 정장 부대를 바라보며 한가을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제대로 준비를 못한 거라고?’ 이어 강현우는 집사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자, 시작해.” “아가씨!” 그의 제스처에 남자들은 구호 외우 듯 일치한 목소리로 아가씨를 외쳐댔다. “집으로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 ‘뭐지? 이 묘한 창피함은?’ 한씨 가문에서 그 동안 냉대를 받으며 세월에 익숙해진 건지 오히려 그녀를 이토록 환영해 주는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리액션을 해야 할지 기억이 혼란스러웠다.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던 한가을이 강현우를 향해 말했다. “가, 가시죠.” ‘얼른 가자... 경비들도 다 구경하고 있잖아...’ 그런 그녀의 반응을 재밌다는 듯 살피던 강현우는 뭔가 눈치챈 듯 묘한 시선으로 한가을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왜 너 혼자 여기 있어? 슈퍼 심부름... 같은 건 아닐 테고?”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그대로 할 순 없으니 어떻게 넘어가면 될까 고민하던 그때, 한여름 깊은 산속 샘물처럼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뒷좌석에서 들려왔다. “안 가?” 한가을은 그제야 강현우가 내린 차에 또 다른 남자가 한 명 타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순간, 한가을은 주책맞게도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앉은 자세에서도 보이는 긴 다리, 보이는 건 옆모습뿐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창턱에 걸친 손목, 정장의 주름마저 마저 우아하고 섹시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를 놀라게 한 건 단순히 외모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온몸에서 내뿜는 금빛 기운에 그녀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렇다. 그녀의 눈에는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기운이 보이곤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람의 기운인데 금빛은 귀인 중의 귀인. 국가에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도 살짝 보이던 금빛이 이렇게 눈부실 정도라니... ‘뭐지? 전생에 은하계라도 구한 건가?’ 한편, 남자의 재촉에 강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가.” 자연스레 한가을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걸어가던 강현우가 낮은 목소리로 구시렁댔다. “하여간 대마왕님은 성질머리가 더럽다니까.” 그렇게 한가을은 강현우의 손에 이끌려 뒷좌석 즉, ‘대마왕’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찬란한 금빛이 더 세게 다가왔다. 남자는 차가우면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깎아놓은 듯한 이목구비에 날렵한 텁선, 자칫 그저 이쁘장하게 보일 수 있는 외모였지만 꾹 다문 입술과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깊은 눈동자,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가 더 인상적인 남자였다. 한가을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건지 남자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일 것만 같은 눈동자에 살짝 흠칫하던 한가을은 이 금빛에 대해 제대로 묻고 싶었지만 자칫 초면에 바보 취급을 당할 것 같아 잠시 고민한 뒤 물었다. “그쪽도 제 오빠인가요?” 그녀의 말에 조수석에 앉은 강현우가 푸흡 웃음을 터트렸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남자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대답, 자칫하다 분위기가 차갑게 굳을 뻔했으나 친절한 강현우 덕분에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얘 이름은 이수현이야. 그리고 너한테 오빠는 나 하나뿐이고.” ‘이수현? 이수현... 어디서 들었더라...’ 익숙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흔한 성이긴 했지만 해성시 2대 재벌가 오너의 성이 이씨, 강씨라고 했지. 게다가 이 정도 재력이라니... 그냥 우연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그때, 강현우가 설명을 이어가싿. “너 데리러 오는데 얘는 그냥 가는 길이라 따라온 거야.” “아, 네.” 고개를 끄덕인 그때, 한가을의 얼굴을 쭉 스캔하던 이수현이 입을 열었다. “이 차들 다 내 차잖아.” ‘사람 무시하고 있어.’ 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 최대한 화려하고 정중하게 가라시는데 회사 차는 다 내보냈는걸.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같은 차를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미친 자식은 너뿐이고.” 초강력 강박증 환자인 이수현은 양말 한짝 까지도 같은 브랜드의 같은 컬러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그것은 차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차는 내부 인테리어까지 전부 동일한 제품으로 꾸며져있었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이바흐 차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리를 뜬 뒤에야 경비원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아까 저 사람들이 데리고 간 사람 한씨 가문 딸 맞지?” “응, 근데 친딸이 아니라고 쫓겨났다던데. 친부모는 어디 산골에서 지내는 거지라고 들었다고.” “거지? 자넨 저게 거지로 보여? 거물이 분명해.” “하, 그럼 한씨 가문에서는 대어를 놓친 거네?” 부자 동네에서 일하며 유일한 낙이라곤 재벌가들의 가십을 나누는 것뿐인 경비원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때, 그들 중 한 명이 잽싸게 입을 다물더니 도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어휴, 큰일 날뻔했네.’ 하지만 백수영, 한여름은 경비원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큰 저택에서 사는 재벌가 일원과 경비원들은 질적으로 신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해성시 홍보대사가 이미 내정된 상태긴 하지만 아직 대외적으로 발표는 안 된 상황이잖아? 엄마가 알아봤는데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강성 그룹 담당자래.” 백수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침 네 아빠가 얼마 전에 강성 그룹이랑 프로젝트를 함께 했거든. 우리가 그쪽 회사에 연줄을 댈 수 있다는 말이지.” 이에 한여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정말요? 강성 그룹이면 해성시 4대 그룹 중 하나잖아요! 저희 아빠 대단한 분이시네요!” 딸의 칭찬에 백수영은 으쓱하면서도 짐짓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런가? 어찌나 도도하신지. 프로젝트 한 번 하자는 기업들이 그렇게 많은데 거들떠도 안 본다더라. 그런 강성 그룹에서 먼저 일하자고 제안한 게 바로 우리 그룹이야. 우리 집안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 알겠지? 강성 그룹과 거래를 텄다는 소문이 퍼지면 더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 테고.” 엄마의 설명을 듣고 있던 한여름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강성 그룹과 일했다고? 그럼 우리도 해성시 최상류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건가? 그럼 더 좋은 집안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거겠지? 역시... 한가을 그 계집애가 꺼지니까 일이 술술 풀리네.” “진짜 잘됐네요.” 한여름은 자신의 욕망을 애써 눌러담으며 얌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희가 부탁한다고 그쪽에서 돠줄까요?” “그럼.” 백수영은 자신만만했다. “이번 프로젝트도 저쪽에서 먼저 제안한 거라니까. 우린 동등한 비즈니스 파트너 사이라고. 이 정도 부탁이야 들어주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러면서 백수영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걱정하지 마. 해성시 홍보대사는 무조건 너야. 우리 해성시 이미지를 보여주는 자리에 한가을 그 계집애를 세울 순 없어! 주제도 모르고.” 한편, 백수영의 말을 들은 한여름은 홍보대사 자리가 이미 자신의 것이라 확신했지만 짐짓 겸손하게 말했다. “그럼 저희 지금 강성 그룹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 회사가 아니라 그쪽 집으로 바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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