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차갑고 넓은 은백색 실험실 안에 잘린 사지와 잔해가 바닥에 널려 있었다.
피로 가득 차 있는 큰 방에 옅은 푸른색 액체가 고여 마치 저수지 같았다. 흐릿한 윤곽으로는 인간형 생물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작 생명 징후가 사라진 문어 인간은 이런 상황에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고 스크린 뒤에서 이런 풍파를 많이 본 허진웅도 마찬가지였다.
생명 징후 모니터가 오랫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기에 이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을 것이다.
화면에서 시선을 돌린 허진웅은 더 이상 실험실의 동향을 보지 않고 오늘 오후 직원들이 보고한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암호화 구역에 있는 흉악한 특급 생물이 또 한 번 비싼 중앙 제어실을 파괴했다는 소식에 허진웅은 골치가 아팠다.
최근 매우 흥분 상태인 특급 생물은 이미 수많은 실험실을 파괴했으며 심지어 많은 실험체와 연구원들을 죽였다. 이대로라면 통제 불능의 상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의식 간섭’이라는 신비롭고 기이한 힘 때문에 아무도 그곳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힘든 듯 눈을 비빈 허진웅은 전화기 너머로 여성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17번?”
죽음같이 고요한 공간 속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육사를 안으로 들여보냈지만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세계에서 아무도 그녀에게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생물 분열이 이 정도까지 진행된 것은 지구상의 알려진 종 중에서 플라나리아와 가장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이 정도를 견딜 수 있는 생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강이서는 이곳에서 잠든 문어 인간을 놀라게 할까 봐 두려운 듯한 낮은 목소리로 17번을 불렀다.
“알피노.”
이것은 강이서가 몰래 17번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저 낮은 목소리로 몇 번 불렀기에 다들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의 주인인 17번 문어 인간은 알고 있었다.
스크린 뒤에서 누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연구원은 오디오를 켠 뒤 불필요한 잡음을 제거했다. 이내 그녀의 선명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알피노, 어디 있어?”
그 사람이 돌아서 말했다.
“‘알피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옆의 사람이 말했다.
“이건 이름처럼 들려요.”
연구원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
“실험체에게 이름을 지어주다니, 정말 웃기네.”
순수하고 무지한 여성 사육사에 사람들이 낮은 소리로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나 이때 한 사람이 웃음을 멈추더니 스크린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생명 징후가 회복되고 있어요!”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 허진웅은 눈에 냉랭한 빛이 스쳤다.
스크린 위에서 생명 징후를 나타내는 수치가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생명 징후가 정말로 회복되고 있었다!
너무 큰 서프라이즈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때 누군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험체의 생물 신호 스펙트럼이 조금 변했어요...”
“알피노.”
은백색 제복을 입은 여자는 침묵 속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듯 계속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그들만이 아는 기억이었다.
이름을 지어준 날, 17번은 매우 당황해했고 감정 없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것은 어린 생물이 이해하지 못할 때 나오는 표정임을 강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막 부화한 문어 인간은 강이서가 유리병을 향해 매일 중얼거리는 소리에 점점 외부 세계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강이서와 상호 소통하기 시작했고 이 여자 인간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본인이 알아 듣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알피노, 내가 너에게 지어준 이름이야. 마음에 들어?”
당황스러운 얼굴로 여자의 입술을 바라본 문어 인간은 짙푸른 눈에 안개가 끼었다.
이 여자가 바로 그의 사육사였다.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인간이었다.
문어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본 강이서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입을 벌리더니 천천히 말했다.
“이서, 내 이름은 강이서야.”
문어 인간은 잠기지 않은 챔버 뚜껑을 열고 배양액에서 머리를 내민 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귀여워...”
여자 사육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그녀의 눈빛에 문어 인간은 온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이서는 가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하게 문어 인간의 차갑고 축축한 짙푸른 촉지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서는 아주 부드럽다는 뜻이야.”
그녀의 손가락 끝이 두피를 스치는 순간 문어 인간은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운 전율이 온몸에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강이서가 말했다.
“이게 바로 부드럽다는 의미야.”
이것은 문어 인간의 첫 번째 인식 확장이었다.
점점 성장하면서 사고 능력을 갖추게 된 문어 인간은 뇌 속의 뉴런이 일정 수준으로 복잡해지면서 점점 그녀의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강이서가 거의 부르지 않던 그 이름은 ‘강이서’라는 이름처럼 그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이름이었다.
오직 강이서만이 부를 수 있는 그의 이름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17번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 너무 기뻤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해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어 강이서는 문어 인간에게 몰래 이름을 지어주었다.
“알피노, 일어나...”
그녀는 오직 그만을 위한 독특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알피노...”
부드러운 부름 속에서 잘린 사지와 끈적한 문어 잔해 사이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부서진 생물 조직 아래에서 창백하고 석고 조각 같은 푸른빛이 도는 팔이 천천히 나왔다.
탄탄하고 아름다운 근육은 부서진 그의 모습처럼 왠지 모를 취약함을 풍겼다.
“알피노, 나 여기 있어.”
부드러운 그녀의 부름과 함께 팔이 힘겹게 기어 올라오더니 창백하고 부서진 문어 인간이 피바다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몸에 온전한 피부가 없었고 곳곳에는 깊은 상처만 남아 있었다.
잘생기고 정교한 얼굴에 긴 균열이 생겼지만 그 아래의 살과 조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치유되고 있었다.
초라한 모습의 문어 인간은 속눈썹을 미세하게 떨며 유리판 뒤의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서.”
가벼운 한마디였지만 부서진 그의 몸처럼 가슴 아픈 느낌을 주었다.
이 강력한 생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약한 기질에 유리 뒤에 있던 강이서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매우 슬퍼 보였고 곧 울 것 같았다.
문어 인간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슬펐다. 심장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은 옅태껏 겪었던 어떤 분열 공격보다도 더 컸다.
“이서.”
자신이 이서를 슬프게 한 것일까? 그렇다면 더 많은 고통을 겪을지언정 그녀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육사가 부드러운 두 손으로 유리판을 짚었다. 손가락 끝은 어찌나 힘을 줬는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리 와, 끝났어.”
눈시울이 붉어진 강이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문어 인간은 후회와 애틋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숨을 쉴 수 없었다. 무수히 많은 날카로운 가시가 심장에 박힌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이것은 이전에 겪었던 그 어떤 분열 공격보다도 더 큰 고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