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박씨 저택 거실.
하얀색 캐리어 하나가 심민아의 앞으로 밀려왔다.
“당신 물건 챙겨서 그렇게 좋아하는 개자식한테 돌아가.”
박지훈이 팔짱을 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빠, 엄마 내쫓지 마.”
박수연은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녀가 아는 심민아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보다 더 큰 캐리어를 꼭 끌어안고, 동그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안쓰러운 모습을 보였다.
“엄마, 제발 가지 마.”
박지훈은 박수연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엄마는 우리 때문에 슬퍼한 적 없어! 눈물도 전부 그 개 같은 남자 때문에 흘린 거야! 그러니까 빌지 마!”
박진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지훈이랑 수연이 방으로 데려가서 쉬게 해요.”
두 아이가 도우미 김희연의 손에 이끌려 사라지자, 박진호는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심민아에게 건넸다.
서류봉투를 열어 보니,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여덟 곳의 부동산과 수십 대의 고급 차, 그리고 수천억 상당의 주식 문서가 들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심민아가 평생 흥청망청 써도 남을 막대한 재산이었다.
“이건 위자료야. 별문제 없으면 이혼합의서에 서명해.”
박진호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냉담하게 말했다.
심민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미래의 그녀는 대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왜 곧 이혼할 상황에서도 악독한 전처에게 이렇게나 큰 재산을 내주는 남편을 뿌리치고, 한 번 배신한 가난한 남자에게 매달렸을까?
그녀는 펜을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고고하고 차가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애교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나 배고파.”
“방금 뭐라고 했어?”
박진호가 놀란 듯 물었다.
결혼 6년 동안,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늘 혐오와 원망 가득한 눈으로 꺼지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에게 애교를 부리며 여보라고 부르고 있었다.
“여보.”
심민아는 다시 한번 불렀다.
“내일 이혼하더라도 오늘까지는 내 남편이잖아.”
박진호의 차가운 눈빛에 일렁이던 파문이 금세 잠잠해졌다.
‘나 설마 잠깐 기대한 거야? 이 여자가 달라졌다고?’
‘됐어, 변해도 전부 방성훈 때문이겠지.’
“헛수고하지 마. 난 절대 수연이 골수를 빼서 방성훈 딸을 살리는 일에 동의 못 해.”
그는 그녀가 달라진 듯한 모습이 전부 방성훈 때문이라고 여겼다.
심민아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박진호는 이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턱을 테이블에 대고는 임미정이 해 줬던 조언을 떠올렸다.
“네가 6년 동안 얼마나 막 나가도 박진호는 다 감싸 줬잖아. 지금 네가 조금만 고개 숙이고 살살 달래면 절대 이혼 안 할걸?”
그녀는 박진호의 차가운 눈빛과 자신에게 적개심 가득한 박지훈을 떠올리고 또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야...”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갑자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한 그릇이 눈앞에 놓였다.
고개를 들자, 박진호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조명을 등진 채 서 있는 그의 이목구비는 유난히 또렷해 보였다. 소년 시절이든 지금이든 그는 항상 그녀를 놀라울 정도로 매혹시켰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 말은 차갑지만 행동은 완전히 다르잖아. 이렇게 국수까지 직접 끓여 주고!’
싱글벙글 웃으며 그릇을 받는 그녀에게 박진호는 냉랭하게 말했다.
“먹고 나서 나가.”
마치 손님을 쫓듯 한결같이 차가운 태도였다.
“...”
‘다르다는 말 취소.’
심민아는 살짝 시무룩해졌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박진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으러 정원 쪽으로 나갔다.
심민아는 사실 몹시 배가 고팠다. 6분 만에 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우자 배도 부르고 잠이 쏟아졌다.
‘이참에 그냥 여기서 자 버리자. 그러면 박진호도 날 함부로 못 쫓아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소파 위에서 바로 잠이 들었다.
약 20분 뒤, 박진호가 돌아와 무심결에 거실을 둘러봤다.
거실은 깨끗했고, 깨진 그릇도 어질러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 국수는 전부 비어 있었고, 소파 위 여자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어느새 잠든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박진호는 이 광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그가 수도 없이 꿈꿨던 장면 같았다.
기억 속의 심민아는 그가 만들어 준 음식을 때려 부수며 역겹다고 욕했던 사람이다.
그는 조용히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눈길에는 억누른 듯한 깊은 정이 스쳐 지나갔다.
“민아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네 꾀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야.’
...
달콤하게 숙면을 취하던 심민아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깨고 말았다.
눈을 떠 보니, 아들 박지훈이 눈가가 빨개진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작은 주먹을 꽉 쥔 모습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위태로웠다.
“수연이를 어디에 숨겼어!”
심민아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찰나, 박지훈은 종이쪽지를 그녀의 손에 던졌다.
쪽지에는 박수연의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빠, 엄마가 아빠랑 우리를 떠나는 건 싫어. 수연이가 우리 가족을 구하러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