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심민아, 네가 원하는 대로 우리 이혼하자.”
병원, 중환자실.
서명이 끝난 이혼협의서가 심민아의 앞으로 건네졌다.
“우리 결혼했었어?!”
심민아는 이혼협의서에 적힌 이름과 날짜에 시선이 붙잡혔다.
박진호, 경안시에서 유명한 인물. 품행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8살에 박씨 가문을 물려받아 최연소 상계 주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6년 뒤 나는 좋아하던 사람이랑 결혼을 했다는 거네?! 미친, 이거 꿈 아니야?’
그녀는 뺨을 꼬집었다.
“앗, 아파!”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귀여운 똥머리를 한 어린 여자아이가 다가와 심민아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수연이 말 잘 들을게. 피를 또 뽑아도 괜찮아. 엄마, 아빠랑 이혼하지 마. 나랑 오빠 두고 떠나지 말아 줘...”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마르고 허약해 보였고, 하얀 팔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랑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했다.
심민아의 뇌가 또다시 멈춰 버렸다.
‘어, 엄마? 내가 박진호와 결혼해서 딸까지 낳은 거야?’
그녀는 동창회 끝내고 돌아가려다 연쇄 살인마에게 쫓긴 기억이 있었다.
부상으로 기절했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웬걸 6년 뒤로 회귀한 상태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 재벌가 사모가 된 것으로 모자라, 고통 없이 엄마가 되다니...
‘이건 정말... 너무 짜릿해!’
“아가, 이거 누가 이렇게 만든 거야?”
심민아는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18살인 그녀는 엄마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라도, 내 새끼를 지켜야 한다는 건 알았다.
‘누가 감히 내 딸을 건드려!’
박수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 주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내 동생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
박지훈은 동생을 뒤로 감싸고 심민아를 차가운 시선으로 쏘아봤다.
“쇼하지 마. 수연이가 입은 상처가 다 누구 탓인데?”
심민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탓이라고? 말도 안 돼.”
평소 자신이 좀 거만하고 태도가 불량하긴 해도, 자식을 학대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박지훈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개 같은 남자를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잖아! 친딸을 그 자식 딸 헌혈 도구로 쓰더니, 이제는 수연이 골수까지 뽑아 그 자식 딸을 살리겠다고? 당신은 엄마할 자격 없어.”
“오빠,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박수연은 다정해진 엄마가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녀는 울먹이며 심민아에게 애원했다.
“수연이가 원해서 하는 거야... 엄마가 강에 뛰어들지만 않는다면 수연이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박진호는 딸을 안고 가볍게 달래듯 토닥였다.
심민아를 바라보는 눈에는 실망만이 가득했다.
“내일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수속 밟자.”
그는 자신이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언젠가는 그녀가 마음을 돌릴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6년이라는 세월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기다려 봐도 소용없다는 것을...
60년을 더 기다려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방성훈뿐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그에게 단 한 줌도 주어지지 않았다.
박진호는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나 버렸고, 심민아만 그 자리에 멍하니 남았다.
그녀는 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지만, 지금 상황만 봐도 자신이 꽤 악독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심민아는 하루빨리 이 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휴대전화를 보니 연락처에는 딱 한 명, 방성훈만 저장되어 있었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절친 임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 시간 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임미정이 병실로 뛰어왔다.
“미정아!”
“너 누구야?”
임미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심민아를 밀어내며 경계했다.
어떤 남자의 이간질로, 심민아는 임미정과 모든 연락을 끊었고 오히려 적으로까지 여겼다.
그런데 오늘 심민아가 먼저 전화를 걸어 온 것도 모자라 친근하게 안기기까지 했으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나 민아야. 18살의 심민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황당한 얘기를 믿지 않았을 테지만, 임미정은 믿었다.
18살의 심민아는 심씨 가문의 딸로 경안시에서 칭송받았다. 하지만 24살의 심민아는 비굴하게 바닥까지 내려앉아 모두에게 조롱받는 연애 바보가 되어 있었다.
“미정아, 이 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심민아는 지난 6년간 일어난 모든 일을 간절히 알고 싶었다.
자신이 어떻게 박진호와 결혼하게 됐는지, 또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아들과 딸이 자신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게 됐는지.
임미정에게서 6년간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심민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6년 뒤 난 연애 바보가 돼서 어떤 남자한테 심하 그룹을 넘겨줬고... 그 남자는 나를 배신하고 자기 첫사랑이랑 이어져서 딸까지 낳았다는 거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내 딸을 강제로 그 남자 딸한테 피를 주도록 만들었다고?”
그녀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이해가 안 됐다.
“나는 대체 무엇을 바라고 그런 짓을 한 거야?”
박진호 같은 남편을 두고, 평범하고 가난한 남자를 쫓아다니며 빌붙다니 말이다.
임미정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나도 몰라. 그땐 정말 방성훈이 너한테 부적이라도 먹인 줄 알았어. 방성훈 딸을 살리겠다고, 너는 자해 소동까지 벌여서 고작 다섯 살인 수연이한테 골수를 기증하게 했잖아. 네가 한껏 작심하고 날뛰어 준 덕에, 박진호도 드디어 너한테 이혼을 제안하게 된 거고.”
“뭐라고?”
심민아의 얼굴에는 물음표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