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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서현은 마치 김빠진 풍선처럼 녹초가 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귀가에선 바스락바스락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서현은 쿡쿡 쑤시는 아픔을 참아가며 힘겹게 몸을 돌려 옆에서 옷을 입고 있던 김도하를 바라보았다. “도하 씨, 다음 주는 할아버지 생신이에요. 함께 본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 김도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눈에 띄게 짜증이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차갑게 식은 시선을 이서현에게 돌리며 그녀를 매섭게 훑어보았다. “그래. 함께 본가에 가서 할아버지 생신을 축하해 드릴 수는 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도하는 이서현을 깊은 혐오가 서린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하지만... 너 제발 자중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3년 전, 네가 술잔에 약을 타서 내 침대로 기어들어 오지만 않았더라도 태연이와 헤어지지 않았을 거야. 할아버지의 부추김에 못 이겨 너와 결혼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김도하는 생각해 보면 볼수록 이서현이 정말 치밀하게 일을 꾸민 것 같았다. 그녀가 김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부터 온 가족이 그녀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김도하를 본가로 불러 이서현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머릿속으로 이서현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며, 김도하는 하찮은 물건을 보듯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힐끔 보고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는 개봉되지 않은 약을 꺼내어 이서현에게 던졌다. “챙겨 먹어. 난 아이를 원하지 않아.” 김도하는 이서현같이 머리를 굴리고 비열한 수법으로 자기 옆자리를 꿰찬 여자는 그의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약포장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이서현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치며 작은 상처를 남겼다. 이서현은 살짝 숨을 들이마시며 따끔따끔한 아픔을 참아냈고, 이어서 비웃듯 미소를 짓더니 김도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도하 씨, 말은 똑바로 해요. 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원래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지... 답은 도하 씨가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이서현은 지난 3년 동안 본가에 돌아가 동생의 아이를 볼 때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아빠 미소’를 짓는 모습을 분명히 기억했다 ‘도하 씨는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나와 아이를 갖기 싫을 뿐이겠지.’ 이서현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굳어졌고,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김도하는 말없이 이서현을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들고는 담뱃갑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차갑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게 약을 안 먹는 핑계가 될 수는 없어.” 김도하는 다시 한번 매서운 시선으로 이서현을 쏘아보며, 그녀가 약을 먹지 않고 기어코 아이를 가져 자신을 협박할까 두려워했다. 이서현의 목구멍이 잠기며 쓴맛이 밀려왔다. 그리고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 한 잔을 따라 김도하 앞에서 약을 삼켰다. 그제야 김도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 버렸다. 이서현은 김도하가 떠나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러내렸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 김도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더 이상 버티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 다음 날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이서현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황급히 준비하고, 차고에 있는 차 중 한 대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지각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지금 버스를 타면 제시간에 도착하기 어려웠다. 이서현은 빠른 속도로 달려 15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이서현은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며 병원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서현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야, 너 들었어? 오늘 우리 병원에 대단한 분이 오셨대.” “누군데? 말 좀 해봐! 어서 알려줘!” “이엘 그룹 김 대표님, 김도하가 왔대.” “재벌이 우리 병원에 왜 왔대?” “듣자 하니, 여자 친구가 몸이 안 좋아서 임신이 어렵다고 해. 그래서 김 대표님이 직접 그녀와 함께 진료받으러 왔대.” “정말 대단한 남자네. 다른 재벌이었다면 아이도 못 가지는 여자 친구라면 진작에 바꿔버렸을 텐데...” “잠깐, 그 여자 친구가 누군데?” “임태연, 그 피아노 잘 치는 여자 말이야.” “아, 그 여자구나...” 두 사람의 대화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서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바지 위에 생긴 주름을 펴며 손을 조용히 움켜쥐고 침묵 속에서 산부인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 있던 간호사가 주저하며 말했다. “이 선생님, 어제 유 선생님이 다리를 다치셔서 오늘부터 VIP 병동도 이 선생님께서 돌보셔야 해요. 지금쯤 회진 돌 시간이 됐네요.” 간호사는 이서현에게 환자의 차트를 건넸다. 이서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차트를 받아 들고 대충 훑어보았다가, 다음 환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눈을 번쩍 크게 떴다. 그 환자는 바로 임태연이었다. [임태연, 난임, 배란 장애, 여러 차례 치료 실패 이력] 차트에 적힌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환자가 1년간 이 병원에서 치료받았다는 기록이 없었다면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즉 임태연과 김도하는 오래전부터 만나왔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임태연은 이서현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공공연히 몸을 조리하며 임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서현은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제야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서현은 입가에 한숨 섞인 미소를 짓고 차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주임 교수님께 휴가를 내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이서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이 차갑게 굳은 채로 병원을 떠났다. ... 30분 후. 핸즈 별장. 이서현은 차를 대충 별장 앞에 세우고 갓 작성된 이혼 서류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젯밤의 후끈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대신 은은한 자스민 향이 방 안에 퍼져 있었다. 김도하가 알아차리지 못할까 봐, 이서현은 이혼 서류를 방 안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다. 그러고는 침대 밑에서 여행 가방을 꺼내 옷장을 열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장이 꽉 차 보였지만, 사실 그녀의 옷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김도하의 옷이었다. 짐을 싸는 데는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서현은 자신의 몇 안 되는 소지품을 정리한 후, 가방을 들고 내려와 트렁크에 실었다. 그녀는 정교하고도 텅 빈 별장을 바라보며 갑작스러운 해방감을 느꼈다. 3년 동안, 이서현은 이 넓은 집에 갇혀 매일 김도하의 귀가를 기다렸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쳐다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늦지 않았어...’ 이서현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고 차를 타고 멀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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