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강이준은 그 질문에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억지 그만 부려. 그깟 구슬 때문에 왜 다른 사람이 된 건데?”
이시연은 눈을 감은 채 힘이 풀릴 때까지 옆으로 늘어뜨린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강이준은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너무 피곤했다.
“이시연, 왜 그렇게 아라가 못마땅한 건데? 착하고 너그러운 것 좀 따라 배울 수 없어? 걘 널 존중해 주고 우리가 싸울 때도 제일 먼저 네 편을 들어주면서 네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널 배려해 줬어. 대체 왜 걔가 싫은 건데?”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질문을 뱉어냈다.
인내심이 바닥났다.
이시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걔가 그렇게 좋으면 나랑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서 걔를 만나. 둘이 소꿉친구에 천생연분이잖아. 속으로 그 여자를 생각하면서 나랑 엮이려고 하는 게 한심하고 뻔뻔한 쓰레기가 따로 없어.”
“뭐라고?”
이시연이 욕하는 건 처음 듣는 터라 순간 그는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
이시연은 그를 노려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너 쓰레기라고.”
그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왜 걔를 싫어하냐고 물었지? 내 남자 친구 마음속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여자라고 생각하는 첫사랑이 있고, 매번 그 여자 생각만 하면서 그 여자를 1순위에 놓고 나를 버리는 데 왜 싫어하냐고? 강이준, 날 뭐로 보는 거야? 난 네 생각만큼 너그럽지 않아. 네가 육서진을 싫어했던 것처럼 나도 걔가 싫어.”
그녀의 말이 고요한 물에 던져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강이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라랑 육서진은 달라. 난 아라를 동생으로만 생각했는데 넌 육서진에게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
육서진은 집안 배경도 좋은데 똑똑하고 성격도 호탕해서 여자들이 좋아했다. 그는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었다.
이시연의 눈빛은 차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이준은 오히려 더 화가 났다.
“우리는 사모님 덕분에 만났고 오랜 세월 누구보다 우리가 함께하길 바라신 분 앞에서 이런 사소한 일로 소란을 피워야겠어? 선생님과 사모님이 날 나무라고 내가 먼저 고개 숙이길 바라는 거잖아? 사모님이 너 보고 얌전히 있으라는 말은 안 해? 네가 억지 부리는 걸 알고 그분들이 실망할까 봐 걱정되지도 않아?”
그의 시선은 이시연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선생님께 일러바친 것에 대해 진심으로 화가 났다.
이로 인해 선생님이 그에게 편견을 가지면 앞으로의 커리어에 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
강이준은 이시연이 자신보다 선생님을 더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 그들 앞에서 나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시연은 그의 경고를 못 알아들은 듯 개의치 않아 했다.
“일러바치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가. 온 세상이 다 알고 나를 손가락질하게 해.”
“내가 못 할 것 같아? 매번 질투심에 나를 믿지 못하면서 아라를 저격하고 못마땅해하잖아. 선생님이 누구 편을 들 것 같은데?”
강이준은 물러서지 않는 이시연의 모습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시연, 계속 이러면 너와 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어.”
적나라한 협박이었다.
‘오늘 여기 오는 게 아닌데, 역겨워 죽겠네.’
“내 앞에서 역겹게 굴지 말고 가서 네 소중한 아라나 챙겨.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녀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고 이번엔 강이서도 막지 못했다.
“이시연.”
강이준은 우울한 눈빛으로 그녀의 가녀린 등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날 몰아붙이면 역효과만 날 뿐이야. 진정하라고 돌려보낸 거지 미쳐 날뛰라고 보낸 게 아니야.”
문을 열던 이시연이 멈칫했다.
“나한테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허 선생님 다시 모셔 올 방법을 먼저 찾아보는 게 어때, 연락처 알려줄까?”
도발하는 말에 강이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시연, 후회하지 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문밖으로 나가려고 돌아서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빠, 허 선생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강이서는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오늘 이 문제를 해결하러 왔고 당사자까지 있는데 해결이 되지 않았다.
강이준도 마침 극도로 짜증이 난 상태였다.
“닥쳐!”
오늘 이시연에게 그만 떼를 쓰고 영화 투자자들을 만나러 가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부른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무산되면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물력을 잃게 될지, 얼마나 많은 돈을 잃게 될지도 모르고 그의 업계 전향도 더 어려워지며 자칫 이대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성 극단에서 덕망이 높은 허영미도 갑자기 더 이상 강이서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한다면 분명 사람들이 온갖 이유를 추측하고 부정적인 소식이 나갈 테니 골치가 아팠다.
늘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이시연이 이렇게까지 난동을 부릴 줄은 정말 몰랐다.
강이준은 심호흡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오늘 이시연은 거침없이 쏘아붙이며 갈 때조차 정말 그와 연을 끊을 기세로 망설임 없이 떠났다.
“허.”
그가 피식 웃었다. 어제 그녀가 하백산으로 다시 간 걸 몰랐다면 이대로 속아 넘어갈 뻔했다.
게다가 자신이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니.
이시연은 그를 위해 자신의 꿈도 기꺼이 포기했는데 어떻게 정말로 헤어질 수 있겠나.
그냥 화가 난 거다.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웃음이 나? 허 선생님이 가면 오빠한테도 좋을 게 없어!”
강이서는 불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이시연이 더 미워졌다.
“이만 돌아가. 선생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생각을 마친 강이준은 마음이 편해졌다.
이시연은 자신이 투자자들을 손에 넣고 있다고 생각하며 허영미까지 들쑤셔 다그치려는 모양인데, 이참에 그녀가 없어도 다 잘 돌아간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었다.
실컷 소란을 피우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알아서 순순히 돌아올 거다.
...
김건국의 집.
안여정은 이틀 동안 한숨을 쉬며 자기 남편을 부추겼다.
“그날 시연이의 태도가 단호한 걸 보고 나도 더 이상 걔들 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둘이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헤어지는 건 내가 아쉬워요. 저번에 봤던 장아라도 며칠 사람들 통해 물어보니까 보통내기가 아니더라고요. 2년 동안 이준이 곁에 자주 들러붙었고 지난 설에는 걔가 다쳐서 이준이가 일도 미루고 일주일 동안 곁을 지켜줬대요.”
김건국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까 시연이가 이준이랑 싸운 게 그 아이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이준이가 구슬 팔찌 오랜 시간 착용한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도 오랫동안 다른 이성이 준 물건을 착용했는데 그걸 참고만 있어요?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요.”
김건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당신 생각은 어떤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