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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강이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지겹다는 듯 말했다. “왜 이렇게 소란을 피워? 대체 무슨 일이야?” 한바탕 무섭게 혼난 강이서가 진정하며 억울한 듯 말했다. “오빠랑 이시연 사이 틀어지기 바쁘게 이시연이 선생님한테 나 가르치지 말라고 했어. 나 곧 졸업이잖아. 허 선생님이 이제 와서 날 가르쳐주지 않으면 난 하성 극단에 들어갈 기회가 아예 없을지도 몰라.” 허영미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몰락한 하성 극단을 수년간 맡아 다시 일으킨 국내 유명 연극 감독이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극단에서는 아직 그녀를 우러러 모시고 있었다. 강이준은 사촌 동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삼촌의 가족만이 남은 유일한 가족이라서 그녀에게 무척 신경을 썼다. 이시연도 고생하는 그를 위해 옆에서 함께 부담했다. 괴팍한 성미를 가진 아가씨가 싫어도 매사 소홀함 없이 열심히 챙겨줬다. 강이서가 학교에서 지내기 싫다고 해서 이시연은 학교 근처에서 가장 좋은 집을 구해줬고 실력이 없어서 제일 좋은 선생님을 고용해 줬으며 육씨 가문의 인맥을 이용해 몇 년째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허영미에게도 연락했다. 어떻게 보면 강이서가 허영미 제자인 셈이라 조금이라도 실력이 있으면 극단에서는 허영미 체면 때문에 그녀를 받아줄 것이다.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지고 극단의 테스트도 앞두고 있는데 허영미가 어제저녁 갑자기 더 이상 강이서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강이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오늘 아침 일찍 강이준에게 일러바치러 왔는데 문제의 원인인 당사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그녀는 이시연을 가리키며 비웃었다. “내 미래를 이용해 오빠가 먼저 고개 숙여 돌아오라고 달래주길 바라는 거죠? 기세등등하게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어요? 왜 이런 수작을 부려요?” 강이준의 눈빛도 여전히 날카로웠다. “우리 둘 싸움에 왜 이서까지 끌어들여?” 이시연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강이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한여름에도 오싹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순간 그는 매우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시연이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난 모르는 일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언니가 허 선생님 데려왔잖아요. 두 사람 헤어지고 선생님이 날 가르치지 않겠다고 하는데 언니가 아니면 누구 때문이겠어요?” 강이서는 그녀가 인정하지 않자 다시 발끈했다. “사람이 참 음흉하고 악독해. 오빠, 화해할 생각하지 마. 저 뻔뻔한 것 좀 봐!” “강이서!” 이시연이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매서운 말투에 왠지 모르게 겁이 났다. “뭐...” 이시연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선생님이 널 가르치지 않겠다고 한 건 나도 몰랐어. 근데 내가 그랬어도 네가 뭘 어쩔 건데?” “오빠, 인정하는 거 봤지? 저 여자 짓이야! 근데, 선생님 이렇게 보내면 오빠가 다시 모셔 오지 못할 줄 알아?” 이시연은 그녀를 무시한 채 강이준을 돌아보았다. “고백하던 날 네가 나한테 한 말 기억나? 이 세상에서 나만 사랑하고 믿는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강이서가 피식거렸다.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 오빠 사랑 받을 자격 없어.” 강이준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 말은 항상 기억하고 있어. 약속을 어길 생각도 없어. 아직도 내 마음속엔 네가 있어. 그날도 말했잖아. 우린 오랜 시간 함께 했고 내 마음속엔 그 누구도 네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틀 동안 네가 했던 행동에 대해 정말 실망했어. 그래도 난 너에게 기회를 줄 거야. 선생님 모셔 와서 계속 이서 가르치게 해. 이서 미래가 걸린 일인데 날 협박할 카드로 쓰지 마.” 피식 웃은 이시연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아직 마음속에 그녀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지? “오빠, 저 여자랑 만나지 마. 내가 구슬 팔찌에 대해 말해준 거 잊었어?” 강이서는 강이준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이시연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라 언니랑 안 만나면 그 언니는 어떡하라고?” 이시연은 더 이상 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은 듯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걸음을 옮겨 나가려고 했다. “어딜 가!” 강이서가 다가가서 상대를 끌어당겼다. “선생님 일에 대해 제대로 해명해.” 뒤를 돌아본 이시연의 눈빛은 평온했지만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네가 뭔데 내가 너한테 해명을 해?” 강이서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으며 처음으로 줄곧 만만하게 생각했던 그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오빠한테 버림받고 본성 드러내는 거지? 날 극단에 못 들어가게 하고 오빠 명예까지 실추시키려는 거지? 사람이 왜 이렇게 악랄해!” 그녀의 말에 강이준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물었다. “이시연, 적당히 안 해? 언제까지 소란 피울 거야? 선생님 앞에서도 모자라 회사까지 찾아와 이래야겠어? 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 가뜩이나 차가웠던 이시연의 눈동자에 차가운 서리가 한층 내려앉았다. “왜, 너도 해명이 필요해?” 그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선생님이 가르치지 않겠다고 했으면 나한테 따질 게 아니라 본인을 돌아봤어야지. 잘못한 건 없나, 파렴치한 짓을 하지는 않았나...”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이준에게 뺨을 맞아 얼굴이 돌아갔다. 도저히 그녀의 생떼를 참아줄 수가 없었다. 하얗던 얼굴이 순식간에 선명한 따귀 자국과 함께 부풀어 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아픔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눈가를 적셨다. 낮게 피식거리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의 두 눈이 한겨울 두툼하게 쌓인 눈처럼 싸늘해 상대의 몸을 흠칫 떨리게 했다. 강이준은 손바닥이 저리며 손가락의 떨림을 멈추려 주먹을 말아쥐었다. 때리는 순간 그는 후회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강이서도 그가 손을 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빠...” ‘정말 이시연을 때렸다고? 아니, 이건 오빠의 잘못이 아니야. 선을 넘은 이시연 잘못이지!’ 차라리 이참에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끝나 사촌 오빠와 장아라가 정식으로 만나길 바랐다. 그녀가 나서기도 전에 본인이 알아서 망신을 자초할 줄이야. 강이준이 정신을 차렸다. “시연아, 나한테는 함부로 해도 되지만 아라는 건드리지 마. 걘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파렴치한 짓을 했다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시연은 이미 손을 들어 따귀를 되갚아주었다. “이시연, 미쳤어? 어떻게 감히 사람을 때릴 수 있어?” 강이서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데 이시연이 그녀의 멱살을 잡아 소파에 던져버렸다. “또 소리 지르면 다음엔 네가 맞을 거야!” 넘어져서 당황한 와중에도 계속 소란을 피우려는데 강이준의 싸늘한 눈빛에 강이서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이시연에게로 향했다. 강이준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이제 갚아줬으니까 화 풀렸지?”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장아라를 건드려? 처음부터 내가 장아라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꺼냈어? 왜 갑자기 발끈하는데? 아니면, 애초에 깨끗한 사이가 아닌데 이런 식으로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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