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김현호의 주먹을 맞으며 나는 차갑게 웃었다.
“여기 때려. 마침 검사하러 가야 하니까 다은이한테 내가 아픈 것도 알리고 좋지 뭐.”
“그렇다고 누나가 신경 쓸 것 같아요?”
김현호가 한마디로 물러나지 않으며 주먹을 내려놓고 빈정대며 돌아섰다.
임다은이 임신한 기회에 그는 잘 행동해야 했다. 아이에게 붙어 임다은의 호적에 오를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서서 차가운 벽면에서 현실감을 느꼈다. 차가운 기운은 피부를 따라 조금씩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핸드폰 벨 소리가 다시 울리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
“배승호 씨, 병세와 관련해 아직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와주시겠습니까?”
멈칫한 나는 떨리는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이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이제 시간이 다한 줄 알고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새로운 희망이 떠오른 것이다.
‘나... 아직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하고 싶은 것도 많이 할 수 있어.’
“배승호 씨?”
주치의의 부름이 다시 나를 현실로 불러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답했다.
“지금 가겠습니다.”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뛰었고 관자놀이도 지끈거렸는데 나는 감정이 너무 격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자제했다.
공교롭게도 전에 검사했던 병원이 지금 와 있는 병원이었다. 굳이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신경과로 가면 될 일이었다.
10분 후, 나는 명함 한 장을 쥐고 나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명함을 접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흐리던 하늘고 개었고 구름 사이로 작은 햇살이 쏟아졌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임다은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임다은은 집요하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받았다.
“배승호, 어디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임다은이 따지며 물었다.
임다은의 횡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원래 좋았던 기분도 조금 가라앉았다.
“우리 이미 이혼했어.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 전화 받지 않을 수도 있지. 전화 받는다고 해도 예의상 받는 거야.”
임다은이 코웃음을 지으며 오만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다고 해서 이혼한 건 아니야. 아직 법원에 가서 서류를 내지 않았잖아? 그러니 법적으로는 아직 부부관계야.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합법적인 남편이고. 아내가 남편의 행방을 묻는 데 무슨 문제 있어?”
나는 손에 든 핸드폰을 꽉 쥐며 답했다.
“그럼 얼른 법원에 가서 처리하자.”
“일단 와. 네가 하는 거 봐서.”
그녀는 계속 논쟁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임다은은 항상 이렇게 군림하며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나는 결국 임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안에서 토하는 소리와 함께 안절부절못하는 김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왜 계속 토하는 거예요? 구토를 멈추게 하는 약은 없어요?”
“입덧은 임신 시기의 정상적인 반응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병실 입구에 서서 차가운 눈으로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임다은은 침대 옆에 엎드려 헛구역질하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검은 머리가 흘러내리며 창백한 얼굴을 반쯤 가렸다.
김현호는 몸을 반쯤 웅크리고 대야를 손에 들고 한 손으로 임다은의 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고 섬세하고 넘겨주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둘러서 있었는데 모두 엄숙한 얼굴이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임다은이 꼬물이를 임신했을 때도 토하며 불편해했고 상황은 지금보다 더 심각했다. 몇 번이나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임다은은 약이 아이에게 좋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을 먹으면서 입덧을 억누르고 쓰러져도 절대 입원하지 않고 하루 종일 일했다.
지금 긴장하고 있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 이 순간 너무 분명히 티 났다.
임다은은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했기에 나의 아이마저 함께 미워했다.
그녀는 김현호에게 달랐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에게도 너그럽고 자비로웠다.
비록 오래전부터 비슷한 상황을 인지했지만 직접 보고 겪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씁쓸한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스며져 나왔는데 얽히고설킨 뿌리처럼 심장 전체를 감싸며 천천히 조였다.
임다은이 먼저 나를 발견했다.
입덧 반응이 많이 누그러진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김현호가 건네주는 물을 마셨다. 붉어진 눈꼬리는 보는 사람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물기가 맴돌던 두 눈동자는 빠르게 폭풍이라도 일으킬 듯 싸늘해지며 김현호의 손을 밀어내고 차갑게 물었다.
“사람 시켜 찾으라고 했더니 병실에 없더라고? 어디 갔었어?”
“의사 만나러 갔어.”
내가 답했다.
“배승호, 제 정신이야? 내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나한테 관심을 두는 거야?”
“내가 만난 건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야.”
나는 임다은의 말을 끊고 빈정거리는 눈빛으로 차갑게 그녀를 쳐다봤다. 마치 낯선 사람을 쳐다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네 상황이 어떤지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임다은이 울먹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콧방귀를 끼었다.
의사들은 눈치가 빨라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서 아수라장인 병실을 벗어났다. 마지막으로 나간 의사는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을 닫기 전에 나를 보는 눈빛은 연민과 동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은 채 합법적인 남편 앞에서도 당당하니, 그 누구라도 상황을 안다면 나를 동정할 것이다.
비슷한 눈빛을 많이 받아서 나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제 곧 임다은 남편이라는 속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승호 형, 누나 상황이 특별하니 더 이상 자극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김현호가 나서며 두둔했다.
“누나가 제 아이를 가져서 기분 나쁘신 거면 저한테 화풀이하세요.”
나는 김현호를 신경 쓰지도 않고 임다은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지면 법원가자.”
“의사가 침대에 누워 쉬라고 해서 요즘은 시간 없겠네.”
임다은이 도발적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눈빛으로는 이혼 안 할 건데, 네가 뭐 어쩔 건 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진 나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억누르고 문에 등을 기대어 섰다. 자신이 최대한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도록 해지만 입을 여니 비로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빠르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상황 봐서?”
임다은이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만지며 고개를 들어 도발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출산할 때까지 안정을 취해야 할 수도 있고.”
그녀는 계속 시간을 끌며 쥐처럼 고양이를 놀리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이렇게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손을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머릿속에는 의사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이 전문의는 외국에서 관련된 수술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배승호 씨 병세에 대해 경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귀국해서 어떤 환자도 받지 않는다고 하니 병원에서도 이분을 만날 방법이 없습니다. 불러서 수술한다고 해도 성공할 확률이 100%는 아닙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임다은과 얽히고 싶지 않았고 죽어서도 남들 입에 임다은의 쓸모없는 애물단지 남편이라고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