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배승호,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새빨간 피가 손에 묻은 게 역겨운 듯 임다은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놓았다.
혐오가 가득 담긴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모습은 이 상황이 얼마나 언짢은지 보여주고 있었다.
임다은은 목이 조여서 피를 토한 게 아니라 그녀의 동정심을 얻기 위해 일부러 연기한 거라고 생각했다.
“임다은, 이제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만하자.”
나는 손을 들어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절망이 극에 달해 더 이상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배승호, 너...”
임다은은 나를 말리려는 듯 눈살을 잔뜩 찌푸렸지만 피로 물든 자신의 손가락을 언뜻 보고선 죄책감을 밀려왔는지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임다은의 옆에 숨어있던 김현호는 비아냥거리고 싶어서 안달 났는지 도발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상대하기 귀찮아서 째려봤더니 흠칫 놀라하고선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호텔에서 나온 후 본가가 아닌 교외에 있는 묘지로 갔다.
여기는 나의 부모와 아이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렇다, 나도 한때는 아빠가 될 기회가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모성애가 없는 잔인한 엄마 때문에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다은은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뱃속에 작은 생명이 생긴 걸 기뻐하기는커녕 극도로 싫어했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아이를 지웠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꿈에 그리던 아이는 이미 숨이 끊긴 지 오래였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난 수술실 앞에 주저앉았다.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임다은이 안쓰러워 차마 한마디 질책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으니 아이는 언젠가 또 찾아올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때쯤이면 임다은이 나의 진심에 감동받아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새 생명을 맞이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임다은은 털끝 하나 건드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러 남자의 스폰서를 자처하며 점점 방탕한 생활을 보냈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던 나는 의사에게 부탁해 직접 아이의 시신을 풍수 좋은 곳에 묻었다.
작은 묘비를 보고 있으니 그때의 선택이 참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그리움을 털어놓을 곳이 하나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내가 죽으면 이 작은 묘비는 빛을 보지 못한 우리 아이가 세상에 왔다 갔다는 유일한 증명이 될 것이다.
묘비에 쌓인 먼지를 보니 씁쓸함이 밀려와 기분이 울적해져 힘없이 그 옆에 주저앉게 되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미리 준비해 온 핑크색 공주 드레스와 인형을 꺼내 바로 옆에 놓았다.
초음파 결과상 임다은은 딸을 임신했다. 만약 태어났다면 지금쯤 9살일 것이다.
한창 천진난만하고 공주 드레스와 인형을 좋아할 나이다.
아이에게 인사를 한 후 무릎을 짚고 간신히 일어나 바로 근처에 있는 합장묘로 향했다.
“죄송해요. 못난 아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다은이랑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편안한 노후도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셨네요.”
무릎을 꿇자 묘비에 걸린 부모님의 사진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마치 날 위로하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아려와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회사의 자금을 빼내 이엘 그룹에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한성 그룹이 내리막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회사 부도 직전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끝내 생을 마감했다.
눈물이 점점 차올라 시야를 가렸고 후회의 감정을 극에 달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엘 그룹은커녕 임다은에게 눈길도 안 줄 거라고 장담했지만 모든 건 상상에 불과할 뿐 잘못을 되돌릴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심한 슬픔 때문인지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졌고 묘비에 기대어 힘없이 눈을 감았다.
의식을 잃은 듯한데 멀지 않은 잔디밭에서 부모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핑크색 공주 드레스를 입고 인형을 품에 안고 있는 어린 소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린 소녀는 돌아서서 나에게 손짓했는데 발그레한 두 볼과 하늘의 별을 새긴 듯 반짝이는 큰 눈망울을 보니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품에 안고 싶었다.
가끔 내 딸이 크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곤 한다. 꼭 눈앞의 이 아이처럼 해맑고 사랑스러울 것만 같았다.
“꼬물아, 기다려. 아빠 금방 갈게.”
“어머니, 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이제 곧 찾아뵐게요.”
나는 차가운 묘비에 기대어 점차 의식을 잃었다.
아무도 모르는 구석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다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여전히 임다은과 김현호가 보였다.
순간 피곤함이 밀려왔고 더 이상한 무의미한 얽매임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천천히 눈을 감았지만 임다은은 날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귀찮음과 아주 조금의 걱정은 배가 되어 분노로 바뀌었다.
“배승호, 언제까지 연기할 거야?”
“제발 좀 조용히 살면 안돼? 기자한테 사진 찍히려고 일부러 쓰러진척했지? 네가 묘비에서 울고 있으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다들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비난하는데 이제 만족해?”
이를 악물며 말하는 임다은의 눈에는 이글거리는 분노밖에 없었다.
사납고 흉악한 표정을 지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임다은의 아름다움이 나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눈물 한 방울이면 마음이 약해졌고 미소를 한번 지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정도로 푹 빠졌다.
하지만 이제는 무관심을 넘어서 약간의 증오가 생겼다.
만약 임다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여전히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배씨 가문의 도련님이었을 것이다.
연예인 따위에 질투는커녕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한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여자의 아름다운 미모에 현혹되어 그 뒤에 숨은 사악한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한 나의 무지함으로 일어났다.
“형, 다 제 잘못이에요. 누나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건데...”
“언론에 이 모든 게 오해라고 말 한마디만 해주면 이엘 그룹이랑 누나는 금방 명성을 되찾을 거예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북하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
나를 산 채로 잡아먹고 싶어 하는 임다은의 모습에 김현호는 눈을 반짝이며 이때다 싶어 열연을 펼쳤다.
어찌나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이는지 그의 진심에 나조차도 감동받을 지경이었다.
역시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다 이유가 있다.
“누나,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가 몸 상하면 어떡해요.”
“앞으로 내가 옆에 없어도 몸 잘 챙겨야 해요. 술 줄이고 밥 제때 먹어요. 알겠죠?”
내가 잠자코 있자 김현호는 시선을 임다은에게 돌려 적극 공세를 펼쳤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시울을 붉히더니 마지못해 떠나는 듯 애틋함을 드러내며 울먹였다.
“김현호. 너까지 왜 이래...”
임다은도 미련 가득한 모습이다. 분노만 가득하던 눈빛은 순식간에 당황함으로 돌변했고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닿기도 전에 헛구역질을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