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네 탓 아니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배승호가 잘못한 거지.”
고개를 들어 김현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내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부드러움이 담겨있었다.
“위로할 필요 없어요. 저는 형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사람이거든요. 제가 없었더라면 형이 집 안 들어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괜히 저 때문에 누나가 아팠잖아요.”
임다은이 편을 들어주자 김현호는 이때다 싶어 점점 더 불쌍한 척을 했고 눈시울까지 붉히며 흐느끼는 병약한 모습은 절로 모성애를 자극했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순수하고 무해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임다은은 순식간에 마음이 약해졌고 안쓰러운 눈빛으로 김현호를 바라보며 가는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됐어. 울지마. 네 잘못 아니야.”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날카로운 가시가 찔린 것 같아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끝이라는 게 와닿아서인지 허탈함보다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내가 보는 앞에서 사랑을 나누는 건 둘째라 치고 김현호는 내 잠옷을 입은 채로 임다은과 함께 안방 침대에 누워있기도 했다.
앞뒤 안 가리고 김현호를 달래는 임다은의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고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는 것 같아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발을 들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다.
“배승호,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참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적당히 해.”
짜증과 분노로 가득 찬 임다은의 눈빛을 보니 억지를 부리는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임다은, 우리 이혼했어. 이제부터 참지 않아도 돼.”
“그럼 먼저 가볼게.”
깊은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았고 더 이상 임다은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평소에 비해 너무 차분한 말투 때문인지 임다은은 충격을 받은 듯 흠칫했으나 곧바로 엄청난 분노를 내뿜었다.
“배승호, 내가 적당히 하라고 경고했지? 한성 그룹은 무너진 지 오래인데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나대는 거야? 널 짓밟는 건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쉬우니까 조심해.”
임다은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날 째려보며 협박했다.
히스테리에 가까운 그녀의 고함을 들으면서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여기서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임다은은 자극받은 듯 미친 듯이 나를 벽으로 세게 밀더니 가느다란 손으로 있는 힘껏 목을 졸랐다.
“배승호,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계속 이렇게 억지 부리면 그땐 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은 희미하게 눈물을 머금었고 이를 악문 채 내뱉는 말은 협박보다 죽음의 경고에 가까웠다.
어쩌면 임다은은 정말 나를 죽이고 싶은지도 모른다.
지금 임다은의 위치로 볼 때 나를 죽이더라도 세계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 어떻게 해서든 무죄를 입증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임다은의 손에 죽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 이상 임다은이 다른 남자와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만신창이가 된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할 필요도 없고 지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3개월이 남은 지금은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임다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썼다.
온 힘을 다했지만 임다은의 손은 여전히 내 목을 조르고 놓지 않았다.
힘이 이렇게 센 여자인 건 오늘 처음으로 느꼈다.
결혼 후, 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성 그룹의 자금을 이엘 그룹을 일으켜 세우는데 투자했고 그때부터 회사 자금 순환이 꼬이면서 뜻하지 않게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한성 그룹이 무너져가자 임다은도 점점 본성을 드러나기 시작했고 처음의 다정하고 자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베테랑 경호원 두 명을 고용해 늘 함께 다녔고 뭐가 그렇게 걱정되고 불안한지 태권도를 배우며 몇 년간 체력을 늘렸다.
임다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지켜보니 자연스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비록 마음이 화살에 뚫린 것처럼 아팠지만 그 후로 손가락 하나 터치하지 않았다.
다행히 임다은은 그동안 쌓은 기술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자유를 원한다며?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으니까 됐잖아.”
“한때 부부였던 걸 생각해서 좋게 좋게 끝내자. 너도 이제 그만해.”
폐가 조이는 기분에 질식감이 점점 더 짙어졌고 이제는 말하기조차 버거울 지경에 이르렀다.
“맞아. 난 자유를 원해.”
“애초에 네가 협박하지 않았더라면 결혼할 리도 없었어. 내 인생은 너 때문에 망가진 거야. 그러니까 넌 절대 벗어날 생각 하면 안 돼.”
“이엘 그룹이 어디까지 올랐는지 알지? 이혼해도 너는 내 손바닥 안이야.”
나의 간절한 부탁은 연민이 아닌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임다은의 손에 힘을 꽉 주었고 손가락 마디까지 하얗게 될 정도로 내 목을 부러뜨리고 싶어 이를 악물었다.
그 말을 듣자 비통함과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이 밀려왔다.
내가 먼저 결혼을 제안한 건 맞다.
하지만 그 당시 나를 찾아와 이엘 그룹을 살려달라고 눈물 흘리며 호소하던 사람이 바로 임다은이다.
난 임다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하나는 이엘 그룹이 한성 그룹의 계열사가 되는 것인데 임다은은 계속 이엘 그룹의 대표이고 기존 직원까지 모두 유지하겠다는 조항도 덧붙였다.
다른 하나는 회사를 일으킬 수 있는 자금을 투자해 주는 것인데 그 조건이 바로 결혼이었다.
둘 중에서 임다은은 후자를 택했다.
회사 자금을 빼내 투자하는 건 큰 위험성이 따랐기에 그 위험성에 버금가는 보상을 내놓는 게 당연하다.
나에게 있어 임다은이 최고의 보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임다은은 나를 뼛속까지 증오하고 원망했다.
“협박이 아니라 결혼은 네가 선택한 거였어.”
“임다은, 지금 이러는 건 너무한 것 같지 않아?”
숨 막히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시야도 흐려졌다.
눈앞에는 혐오에 찬 얼굴로 날 바라보는 임다은밖에 없었지만 그런 그녀를 마주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사랑했기 때문에 지난 10년동안 한 마디의 원망도 없이 임다은의 모든 분노와 증오를 묵묵히 견뎌냈다.
언젠가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마음을 돌려 내 곁에 머무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근거 없는 억울한 프레임을 쓰고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 정말 임다은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할 말은 하고 싶었다.
“닥쳐.”
“네 잘못이야. 다 네 탓이라고.”
임다은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맹수처럼 사나운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고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목을 더욱 세게 졸랐다.
목이 끊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숨을 헐떡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비릿한 향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더니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