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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방 안은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난 두 눈을 감고 기다림을 이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 알람음이 들려왔다. 거의 1초 만에 눈을 뜬 나는 바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핸드폰 잠금을 푸는 손끝이 덜덜 떨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잠금을 풀었다. 드디어 기다렸던 소식을 전해 받았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가 이겼다. 임다은은 송민주와 내가 연락을 주고받도록 용납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송민주에게 진심으로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부탁했다. 송민주에게 의사로서 양심이 있을 거라고 도박을 걸었다. 그리고 이번 판은 내가 이겼다. 낮잠을 길게 잔 탓인지 밤이 되니 머리가 점점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나 방에 갇혀 지내는 게 너무 답답해 몰래 밖을 나가 걸기로 했다. 임다은의 방을 지날 때 그녀의 방 안에서 말로 형용하지 못할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못 들은 척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거실 탁자 위의 어느 문서로 시선이 빼앗겼다. 그건 내가 찾지 못한 나의 진단서였다. 큰 보폭으로 걸어가 문서를 확 열어 안의 내용을 읽어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건 사모님이 방금 가지고 내려온 문서입니다. 쓸모없는 문서라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집사는 어두워진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승호 님에게 문서를 드릴까요?” 난 진단서를 꽉 움켜쥐었으며 귓가의 이명 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어 시야가 새하얗게 번졌다. 임다은이 이 진단서를 챙겨 내려왔다는 건 그녀 역시 내용을 확인했다는 걸 의미했다. 진단서에는 뇌종양 말기라는 진단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손끝이 덜덜 떨려와 진단서를 다시 문서 봉투에 넣으려는데 자꾸 엇나갔다. 그래서 집사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잘 챙겨서 제 방으로 가져다주세요.” 난 굳게 닫힌 임다은 방문을 올려다보며 이 집이 더 감옥같이 느껴졌다. 무형의 틀이 날 가두어 산소가 부족하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래서 집사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별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산책길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늦은 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저도 모르게 재채기가 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호수까지 걸어와 버렸다. 낮엔 아름답던 호수에 달빛만 비추니 조금 괴이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바람이 불면 갈대가 이리저리 흔들렸고 달빛 아래 그림자가 흔들흔들, 나한테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호수의 달빛을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니 어느새 신발이 젖어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저기요, 지금 뭘 하는 거예요?”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는데 호숫가에 그의 외침이 윙윙 울렸다. 몸을 돌리니 경비원이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행여나 내가 안 좋은 선택을 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올라와서 해요.” 고개를 숙이니 어느새 물이 내 허리까지 차올랐고 앞으로 두세 걸음만 걷는다면 이 호숫가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난 천천히 다시 뭍으로 올라오며 겉옷의 물을 짰고 경비원을 향해 사과했다. “죄송해요. 달빛이 아름다워 마냥 걸다가... 제가 깜짝 놀라게 했죠?” “아이고.” 경비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으며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정과 연민이 가득했다. 그는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재벌 임다은의 쓸모없는 남편, 아내가 바람을 피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 “이 동네에서 살면서 가끔은 평범한 고민은 접어두는 게 좋아요. 멀리 보며 자신의 행복만 생각하시고 다시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은 하지 마세요.” “정말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달빛이 아름다워 가까이에서 보려다가 그런 거예요.” “아무리 아름다워도 달은 하늘에 걸려 있는 추상적인 존재이지요. 호수에 비친다고 해도 그건 허상에 불과하며 당신의 목숨을 앗아가 버릴 겁니다. 그러니 어떤 일은 굳이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경비원의 목소리는 늦은 밤바람과 함께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난 고개를 돌려 평소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이 동네에서 가장 미약한 존재인 경비원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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