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하물며 반지를?!
수지의 눈가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하윤아와 언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럴 엄두가 안 나서가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이딴 짓거리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윤아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기세가 아니었다.
“엄마, 얘 좀 봐요. 엄마, 아빠가 20년을 키워줬는데 어쩜 이렇게 배은망덕할 수가 있어요?!”
이때 김은경도 차에서 내려 수지를 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아이를 20년이나 키워줬고 또 수없이 수혈을 받았지만 그녀는 늘 수지가 원망스러웠다. 친딸 하윤아의 인생을 20년 동안 독점해버렸으니까.
“수지야, 현우가 윤아한테 준 반지는 왜 훔쳤어?”
김은경은 시비를 가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수지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나 안 훔쳤어요.”
이에 수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반지 내가 훔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훔쳤다는 표현은 삼갔으면 좋겠네요, 김은경 씨.”
“근데 왜 네 가방에서 나오니 반지가?”
“네가 지금 입고 두르고 있는 것들 죄다 우리 돈으로 산 거잖아.”
“이 가방도 우리한테서 받은 거 아니야?”
김은경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아가 돌아와서 기분이 안 내키는 걸 알아. 우리가 집 나가라고 했다고 더 억울하고 불만스럽겠지.”
“하지만 우릴 탓할 것도 없다. 윤아는 너 때문에 수년간 밖에서 모진 고생을 겪었어. 네가 마땅히 보상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수지는 멍청이를 쳐다보는 듯한 눈길로 김은경을 바라봤다. 하윤아가 조산사에게 안겨 갔을 때 그녀 또한 하윤아와 똑같은 신생아인데 대체 뭘 안다고 보상을 바라는 걸까?
게다가 그 당시 병원에서 이 사건을 알게 된 후 책임을 회피하려고 어디서 찾아왔는지 수지를 대뜸 하동국 부부에게 안겨주었다. 잘못을 저지른 건 병원 측과 그 조산사인데 대체 수지랑 무슨 상관이란 걸까?
하씨 가문에서 20년 동안 수지를 키워줬다고 해도 그동안 수지가 김은경에게 수혈한 횟수, 하동국을 도와 아이디어까지 짜주면서 돈을 벌게 해준 것들, 심지어 하씨 가문이 거의 망해갈 때 몰래 손 내밀어 가문을 다시 일으킨 것까지 왜 지금은 아무런 말도 없는 걸까?
자꾸 빚졌다고 하는데 솔직히 따지고 보면 수지는 정말 하씨 가문에 빚진 게 없다.
하윤아에게 빚진 건 더더욱 없고...
그녀야말로 피해자가 아닐까? 인간이라면 다 친부모님 밑에서 자라고 싶고 온전한 울타리가 있길 바라는 거지, 대체 누가 생판 남에게 끌려가서 자라고 싶을까?
“다시 한번 말하는데 반지 내가 훔친 거 아니에요.”
수지는 김은경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일도 없었다. 멍청이와 언쟁을 벌이는 건 나만 격 떨어지는 법이니까.
“오늘 똑바로 말하지 못하면 여길 떠날 생각 마.”
이때 하윤아가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반지 빼고 수지에게 속한 물건들 전부 무참히 짓밟았다.
“현우 오빠, 이것 좀 봐. 수지가 내 반지를 훔쳤어.”
하윤아는 물건들을 다 짓밟은 후 문 앞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대문 입구에서 늘씬한 체구의 남자가 걸어들어왔는데 그 사람은 바로 훤칠한 이목구비에 무표정한 얼굴을 지닌 강현우였다.
하씨 가문에서 딸에게 정해준 약혼자, 이전에는 수지의 약혼자였고 지금은 하윤아의 약혼자인 그 남자.
강현우는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보더니 또다시 하윤아의 손에 낀 반지를 바라봤다.
“수지야, 너 정말 이 반지를 훔쳤어?”
‘훔쳤다고? 내가?!’
수지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 반지가 강현우가 직접 그녀에게 선물한 반지인 걸 제쳐두고 혼약을 하윤아에게 넘겨주었으면 반지도 수지 스스로 처리할 권한이 있다.
게다가 수지는 본인이 하씨 가문 친딸이 아닌 걸 알게 된 직후 강현우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이 혼약을 강행할 마음도 없고 반지도 안 갖겠다고 분명히 말해두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현우 씨는 이 반지가 내가 훔친 거라고 확정 지은 거네?”
수지는 차분한 눈길로 강현우를 바라봤다. 차가운 시선과 삭막한 태도, 또한 쌀쌀맞기 그지없는 ‘강현우 씨’라는 호칭에 강현우는 저도 몰래 자극을 받았다.
그는 수지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18살 때 약혼식을 올렸고 그녀의 20살 생일이 되면 곧바로 결혼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수지는 지금 본인이 하씨 가문 친딸이 아니란 걸 알게 되자마자 망설임 없이 그에게 이 혼약을 무르자고 있다.
“훔친 게 아니란 증거 있어? 증거 내놔봐.”
하윤아는 강현우의 팔짱을 끼면서 쏘아붙였다.
“오빠, 쟤 지금 쫓겨날 신세가 되니까 몰래 반지를 훔치는 거야.”
“수지야, 너 이전에 이러지 않았잖아.”
강현우는 수지를 빤히 쳐다보며 눈가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현우 오빠 좋아하는 거 알아. 그렇지만 이젠 단념할 때도 됐지! 오빤 네 남자가 아니야.”
“수지야, 우리 집안에서 너 각박하게 군 적 없다. 어쩌면 떠날 때까지 도둑놈처럼 이런 짓을 벌여? 진짜 실망이야.”
하윤아와 김은경 모녀는 장단을 맞추며 ‘도둑’이란 두 글자를 수지의 얼굴에 새겨놓을 기세였다.
조용하게 떠나고 싶었던 수지는 끝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그녀는 분노 어린 눈빛으로 하윤아와 김은경을 노려보며 되물었다.
“지금 나랑 증거를 논하는 거야?”
“오케이.”
곧이어 그녀는 하윤아의 손목을 확 잡고 별장 안으로 끌고 갔다.
“아파.”
“이거 놔.”
“엄마, 나 좀 도와줘요.”
하윤아는 수지에게 손목이 꽉 잡힌 채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흘렀다. 무슨 여자가 힘이 이렇게 센지 손목이 다 부러질 것만 같았다.
한편 수지는 온몸에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녀를 별장 안으로 끌고 오더니 휴대폰을 꺼내 어떤 앱을 열고 곧장 TV를 켰다. 이어서 TV에 캐스팅하고 집안 CCTV 영상을 클릭했다.
하윤아는 스크린에 뜬 CCTV 영상을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미친년이 언제 내 방에 CCTV를 설치한 거야?’
수지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어젯밤 시간대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하동국은 수지를 서재로 불렀고 그때 하씨 가문 도우미 안미진이 몰래 그녀의 방에 들어와 한바탕 뒤진 후 이 반지를 그녀의 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그 뒤로 영상을 2배속으로 돌렸고 오늘 아침 수지가 일어나서 물건을 챙기고 아래층에 내려갈 때까지 그녀는 하씨 가문에서 사준 물건을 일절 챙겨 넣지 않았다.
수지의 침실에만 CCTV가 있는 게 아니라 문 앞에도 한 대 설치되었다.
안미진이 그녀의 가방에 반지를 넣어둔 후 문밖에 나오자 하윤아가 글쎄 도우미에게 돈다발을 건네는 것이었다.
영상에 소리까지 녹음되어 두 사람의 대화가 더할 나위 없이 잘 들렸다.
“아줌마, 내일 수지 저년이 이 집에서 나갈 때 미리 나한테 알려요. 바로 달려와서 괴롭힐 테니까.”
“네, 아가씨. 걱정 말고 저만 믿으세요.”
CCTV 영상이 여기까지 공개된 마당에 또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강현우는 놀란 눈길로 하윤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수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수지는 드디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하동국 씨, 자식 단속이나 잘하세요. 진짜 갈 데까지 간다면 20년 키워준 정이고 뭐고 인정사정 볼 것 없어요. 그때 가서 피차 난감해지지 맙시다 우리.”
그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또다시 강현우에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강현우 씨, 그쪽은 이미 딴 여자의 약혼자예요. 난 그쪽도 별로인데 하물며 반지를 욕심내겠어요?!”
“내가 비록 부모가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적어도 사지 멀쩡하고 사리 분별은 잘해요. 어디 누구처럼 몇 년간 고생 좀 했다고 온 세상이 자신에게 빚진 것처럼 질질 짜진 않는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