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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더는 우리한테 연락하지 마

하씨 가문 하동국은 소파에 앉아서 은행카드 한 장을 수지에게 건넸다. “심씨 가문에 돌아가면 더는 우리한테 연락하지 마.” “이 카드 너 가져. 안에 4천만 원 들어있어. 엄마, 아빠가 수년간 널 키워준 만큼 마지막 남은 정이라고 생각해.” “수지야, 우릴 너무 원망하진 마. 윤아가 그동안 밖에서 모진 수모를 겪었어. 네가 윤아 인생을 20년이나 차지하면서 부귀영화를 다 누렸잖니. 이제 더는 널 남겨둘 수 없어. 윤아만 계속 자극할라.” ... 한 달 전, 하씨 가문에서 친딸 하윤아를 찾은 후 친자확인 검사를 마치더니 곧장 수지를 집에서 내쫓았다. 다만 20년을 키운 딸인지라 차마 그냥 내보내진 못하고 4천만 원을 쥐여줬다. 한편 수지는 하씨 가문의 물건을 일절 안 챙기고 본인 것만 가방에 담으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이 집에서 저를 20년 동안 키워줬고 저도 한때 김은경 씨를 위해 수백 번이나 수혈해 주었으니 이젠 서로 빚진 것 없어요.” “앞으로 한 가족 세 식구가 오붓하게 잘 지내세요.” 말을 마친 수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동국의 눈가에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 몇 년간 일어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그의 머리를 스쳤다... 수지가 처음 김은경에게 수혈했을 때, 하동국은 이미 그녀가 친딸이 아닌 걸 알았다. 그때부터 하동국과 김은경 부부는 몰래 친딸을 찾아 나섰지만 여전히 수지를 키워주었다. 한편으론 수년간 키워준 정이 있어 차마 인연을 끊지 못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김은경이 그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 정기적인 수혈이 필요했다. 병원의 혈액들 전부 정밀한 검사를 마쳤지만 김은경은 여전히 위생 문제로 감염을 일으킬까 봐 걱정됐다. 결국 그녀는 수지를 정성껏 키워주며 정기적으로 수혈을 받았다. 이로써 수지가 하씨 가문의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고 있다는 식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그렇게 수혈은 수년간 진행되었고 횟수를 다 합치면 적어도 수천 번은 되었다. 수지는 어려서부터 김은경의 ‘수혈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중에 김은경은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고 더는 수혈이 필요 없게 됐고 또 마침 그때 자신들의 친딸을 찾게 되었다. 친딸 하윤아는 애초에 병원에서 조산사가 몰래 몇십만 원에 팔아버렸다. 하지만 그녀를 사 간 집에서 세 살까지 키워주더니 아들을 낳았다고 딸인 하윤아를 또다시 팔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윤아는 이집 저집 팔려 다니면서 갖은 학대와 수모를 겪다가 정작 본인이 부잣집 딸이라 금의옥식을 누리고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멘탈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는 본인 인생을 20년이나 훔쳐 간 가짜 딸 수지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며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하씨 가문에 수지가 있다면 본인은 절대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수지 대신 수년간 모진 고통을 겪었는데 왜 집에 돌아와서까지 진짜 행세를 하는 그녀의 꼴을 지켜봐야 하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하동국과 김은경은 그런 친딸이 너무 안쓰러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20년간 키워준 수지를 매정하게 버렸다. 이름마저 하윤아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재빨리 하씨 성을 빼버려서 수지가 되었다. 하동국은 수지가 이 집을 안 떠나겠다고 울고 불며 난리 칠 줄 알았다. 비록 하윤아는 찾았지만 수지의 친부모님은 여태껏 행방불명이니까. 하동국은 각종 가족 찾기 사이트에 수지의 정보와 전화번호까지 남기면서 그녀의 친부모님도 애타게 찾고 계신다면 바로 연락을 주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럼에도 하동국은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수지의 친부모님이 찾아오지 않고 그녀 또한 이 집을 떠날 생각이 없다면 하윤아만 미쳐 발광하게 될 테니까. 결국 그는 수지의 친아빠가 오성에 사는 심씨 가문의 세대주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지는데... 수지가 은행카드를 안 챙길 뿐만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쿨하게 떠나가 버렸다. 가족 찾기 사이트를 굳이 신경 쓰자면 사이트를 통해 누가 수지에게 연락이 올지 안 올지는 온전히 그녀에게 달렸다. ... 하씨 가문의 별장을 나선 수지가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갈 때 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검은색 벤틀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길옆으로 몸을 피하며 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 차가 그녀 옆을 지나갈 때 속도가 느려지다가 아예 시동이 꺼졌다. 차창이 내려가고 하윤아의 표독스러우면서도 음침한 얼굴이 드러났다. 수지는 차분하게 서서 하윤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솔직히 말해서 하윤아는 꽤 예쁜 편이지만 그동안 모진 수모를 겪었던지 얼굴에 원망과 분노가 잔뜩 뒤섞였다. 그녀는 차 문을 열고 내려와 수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오늘 수지는 검은색 재킷에 청바지, 새하얀 운동화로 착장했다. 단정한 백팩을 메고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올렸더니 청순한 생얼에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유난히 빛났다. 명품이라곤 전혀 두르지 않은 심플한 옷차림이지만 수지가 입고 있으니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주먹만 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화장하지 않아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 차가운 눈동자에 도도함이 살짝 묻어날 따름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자기처럼 맑고 깨끗한 피부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다시 하윤아를 바라보니 김은경이 금방 사준 명품 옷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손에는 또 샤넬 최신상 가방을 들고 있었으며 머리와 얼굴은 관리를 받은 게 뻔했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온전히 회복될 상태가 아니었다. 하동국과 김은경 두 사람 모두 비주얼이 괜찮기에 친딸인 하윤아도 못생길 리가 없다. 하지만 야박한 눈빛과 질투에 휩싸인 표정 때문에 안 그래도 어두운 안색이 더욱 험상궂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두 여자는 문득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한 명은 사악한 황후, 또 다른 한 명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백설 공주 같았다. 고작 피부색의 차이만으로도 하윤아는 이토록 질투가 폭발하는데 그동안 두 사람이 받아온 확연한 교육 차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가방 안에 물건들 다 꺼내봐봐.” 하윤아가 거만하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 집안 물건들 하나라도 챙겼어 봐. 오늘 아작을 낼 거야!” “비겁한 도둑년! 내 인생을 훔쳤으면 됐지, 감히 우리 집안 물건까지 훔치려고?!” 이에 수지는 차분한 눈길로 하윤아를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방을 멘 채 떠나가려 했다. “거기 안 서?” 가만히 두고 볼 하윤아가 아니다. 그녀는 덥석 수지의 가방을 낚아채고 지퍼를 열어서 안에 담긴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중 한 물건을 본 하윤아는 버럭 화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어. 강씨 가문에서 내게 준 약혼반지를 챙겼네?” 이 말을 들은 수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방에 언제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물건이 하나 더 생겨난 걸까? 그건 바로 강씨 가문의 큰 도련님 강현우가 그녀에게 준 약혼반지였다. 하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두 사람이 어릴 때 이미 혼약을 맺었다. 하여 강현우는 18살이 되자마자 하씨 가문에 찾아와 수지에게 약혼반지를 선물했다. 그녀가 20살이 되거든 둘은 즉시 혼인신고를 마치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20살까지 3개월을 앞둔 이 시점에서 진짜 딸 하윤아가 돌아왔으니 이 혼약도 당연히 하윤아에게 돌아가야 한다. 수지는 이 집을 나설 때 분명 반지를 챙기지 않았다. 즉 하씨 가문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음해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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