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박서진이 VIP 병실을 나왔을 때 긴 복도에는 이다은과 닥터 제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최정수가 다급하게 이쪽으로 뛰어왔다.
“닥터 제니와 이다은 씨 봤어요?”
박서진은 성큼성큼 걸어가 최정수를 붙잡고 물었지만 최정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는 길에 마주치지 못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부님이 이렇게 화가 난 거예요?”
“그건 당신 부인한테 물어봐요!”
박서진은 최정수를 놓아주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주 사립병원의 모든 출입구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나타나 사람은 고사하고 파리 한 마리도 날아나갈 수 없도록 앞을 지켰다.
같은 시각, 수지는 이다은과 함께 별장으로 돌아와 밀실로 들어간 후 변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부님, 박서진 씨가 병원 출입구를 전부 막고 있어요.”
이다은은 CCTV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수지에게 보고했다.
“조금 있다가 지하실로 가자.”
수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 별장을 설계할 때 수지는 밀실에 지하실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고 지하실을 통해 청주 사립병원의 창고로 바로 갈 수 있게 했다.
박서진이 사람을 시켜 청주 사립병원의 입구를 지키고 있다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
“네. 사부님이 했던 말을 전부 최 원장한테 전달했고 지금 VIP 병실로 갔어요. 옆집 별장에도 최 원장 가족이 이사 가는 걸 감시할 사람을 보내놨어요.”
이다은은 핸드폰으로 수지가 지시한 일들을 처리하며 의아한 점을 수지에게 질문했다.
“사부님, 나희정의 핸드폰에 어떻게 박씨 가문에서 저한테 보낸 진료 요청 메일이 있는 걸까요? 전 어떠한 정보도 누설한 적이 없는데요.”
수지는 창문으로 걸어가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얼마 전 박서진에게서 맡았던 나무 향을 떠올렸다.
청주 사립병원에는 나무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는 사람이 없었고 박서진은 향수를 뿌리지 않으며 나무 향은 다른 곳에서 묻어온 것이라 했다.
박선재의 신분이 특별해 외부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박씨 가문 내부에 있는 사람이라면 박서진이 박선재의 치료를 위해 의사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수지는 다른 부하에게 이 일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박씨 가문의 박시연이 가장 즐겨하는 일이 부처님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라고 했고 전에 임수빈을 따라 박서진을 만나러 갔을 때 박서진은 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수지가 밀실에서 CCTV를 확인한 결과, 박서진은 그날 박시연을 만나러 갔다.
“다은아, 난 널 믿어.”
수지는 담담하게 대꾸했을 뿐 자신의 추측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넌 남아서 최 원장 가족이 떠나는 걸 지켜봐. 난 먼저 가볼게.”
“네, 사부님. 이번에는 제가 꼭 잘 처리할게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래.”
수지는 캔버스 가방에 핸드폰과 아이패드를 넣었다. 박선재의 검사 결과서는 이미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기에 따로 챙기지 않았다.
“나 먼저 간다.”
“네.”
“만약 박서진이 널 찾아와서 나에 대해 물으면 상대할 수 있겠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상대할 수 있어요.”
“그럼 나 갈게.”
“조심해서 가세요.”
“응.”
수지는 캔버스 가방을 들고 밀실을 통해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녀는 지하실을 따라 걸어가며 청주 사립병원을 벗어났다.
한편, 병원의 정문까지 쫓아온 박서진은 경호원에게 온몸을 꽁꽁 싸맨 백발의 할머니와 젊은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냐고 물었다.
경호원은 그동안 한 대의 차량도 정문을 나간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경호원의 대답에 박서진은 미간을 찌푸리다 뒤돌아 VIP 병실로 향했다. 입원 병동에 도착한 박서진은 최정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옥분을 끌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거 놔요.”
주옥분은 울먹이며 말했다.
“여보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난 문자를 받고 당신을 도와주려 했을 뿐이에요.”
“짝-”
최정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뒤돌아 주옥분의 뺨을 때렸다.
“내가 어쩌다 당신 같은 멍청이와 결혼을 했을까? 당신이 한 짓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애들까지 해치는 일이야. 내가 데려온 사람을 당신이 뭔데 의심해? 누가 당신한테 내가 데려온 닥터 제니가 가짜라는 문자를 보냈으면 나한테 연락해서 확인을 해야지. 왜 바로 VIP 병실로 가서 소란을 피워. 옥분아, 너 왜 이렇게 멍청해. 몇 년 동안 너무 편하게 지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최정수는 말을 이어가며 눈시울을 붉혔다.
“겨우 사부님의 눈에 들어서 힘들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내가 쉬웠을 것 같아? 사부님이 없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을 것 같아? 당신이 병원장 사모님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아? 당신은 내 일에 상관하지 말고 집에서 현모양처로 지내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내가 누구의 일에도 간섭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전에는 내 말을 잘 들었으면서 이번에는 왜 낯선 문자 한 통을 믿은 거야?”
최정수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젠 다 끝났어.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최정수는 주옥분의 손을 놓더니 얼굴을 감싸 쥐고 그대로 주저앉아 입원 병동 정문에서 서럽게 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병원장이 재직한다는 소식이 병원에 전달되었고 최정수는 명예롭지 못한 모습으로 병원을 떠나야 했다.
“최 원장님.”
박서진은 최정수에게 다가가 거절할 수 없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희 이야기 좀 할까요?”
최정수는 고개를 들어 박서진을 바라보았다.
“사부님에 대해 물어보시려는 건가요? 사부님이 절 병원장 자리에서 해임한 순간부터 전 그분에 대한 어떤 정보도 말할 자격이 없어요. 다른 사람을 찾아가세요.”
“닥터 제니의 진짜 모습을 최 원장님은 본 적이 있죠?”
박서진은 허리를 굽혀 최정수를 잡아당겼다.
“내가 병원의 모든 출입구를 막았어요. 닥터 제니는 아직 병원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전 닥터 제니를 찾아야 해요.”
“미안해요.”
최정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부님의 진짜 모습은 저도 본 적이 없어요.”
설사 봤다고 해도 최정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닥터 제니는 최정수를 청주 사립 병원장 직위에서 해임하고 병원에서 떠나도록 했을 뿐 전에 최정수가 번 돈이나 그가 자녀들을 위해 마련해 준 것들까지 거둬가지 않았다.
이건 닥터 제니가 최정수에게 보이는 마지막 예의이자 경고이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닥터 제니가 사람을 포섭하는 수단이다.
최정수는 여태껏 저축해온 돈으로 충분히 남은 생애 동안 일을 하지 않고 주옥분과 둘이서 잘 지낼 수 있다. 그 전제는 더 이상 스스로 무덤을 파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닥터 제니는 최정수에게 희망을 줬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절망을 선사해 줄 것이다.
“박서진 씨, 전 사부님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분의 성별도 몰라요. 만약 사부님이 박서진 씨의 진료 요청을 취소했다면 다시 말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사부님은 동일한 환자를 두 번 진료하지 않거든요. 이럴 시간에 어르신에게 수술을 해줄 수 있는 의사를 다시 찾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친 최정수는 몸을 일으켜 주옥분을 끌고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최정수는 몇 년은 늙은 것 같아 보였다.
박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렇게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사람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박서진은 빠르게 움직였지만 닥터 제니의 행동은 그보다 더 빨랐다.
오랜만에 자신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을 만난 박서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어디론가 전화했다.
“보경시의 모든 이동 경로를 봉쇄하고 돋보기안경에 마스크를 쓴 백발 할머니를 찾아.”